 |
홍석기 목사
(상리교회, 범사회문제대책운동본부 사무총장) |
미국의 어느 큰 부잣집에 보물창고가 있었다. 그 소문을 들은 도둑의 귀가 솔깃해졌다. 그 사람의 재산 규모로 볼 때, 보물창고에 ‘엄청난 현찰이나 귀금속’이 가득 들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기회를 엿보다 그 집을 털기로 했다. 그는 첨단 기술로 삼엄한 경비와 보안 장치를 뚫고 마침내 보물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창고에는 ‘낡은 자전거’ 한 대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허탕을 친 도둑이 화가 나서 부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 도대체 뭐야? 보물창고에 숨겨 놓은 게 고작 고물 자전거란 말이야?” 그러자 ‘허허’ 웃으며 도둑에게 말했다. “보물창고를 지어놓고 거기에 들어갈 ‘가장 소중한 보물이 무엇인지’ 가족과 함께 의논해 봤소. 그랬더니 이구동성으로 말한 게 바로 그거요.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사업에 크게 성공했을 때도 아니고, 대저택을 구입한 때도 아니고, 호화롭게 세계 일주를 했던 때도 아니오. 우리 가족이 가장 행복했던 때는 가난했던 시절에 아이들과 공원에서 그 자전거를 타며 즐기던 주말 오후였소. 그래서 그 고물 자전거를 우리 가정의 가장 소중한 보물로 정한 거요. 어쨌든 우리 가정의 보물을 가져가지 않아서 정말 고맙소.” 그 부자의 가장 소중한 보물은 낡은 자전거에 담겨있던 ‘행복한 추억’이었다. 자녀들과 함께 단란하게 보냈던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정말로 소중한 보물’이 무엇인지 제대로 발견하지 못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정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나? 여기에 대해서는 대답이 조금씩 다를 것이다. 가정에서 필자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아내’이다. 가장 존경하는 분은 ‘부모님’이시다. 그러나 “가정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자녀들’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우리 아이들의 ‘그전 이름’을 부르기 좋아한다. 우리 아이들이 태어날 때 지어준 이름은 ‘사라, 사무엘’이다. 그런데 한국으로 오면서 ‘개명’을 했다. ‘그전 이름’을 부르기 좋아하는 이유는 아이들과 가졌던 지난날의 행복했던 추억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크게 떠들고, 웃으며, 즐겁게 지냈던 어린 시절의 생각이 나곤 한다. 그러면 어느새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손주가 벌써 3살이 되어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딸이 손주의 사진과 동영상을 가족톡에 올리곤 한다. 딸이 손주를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모른다. 딸에게 보물 1호는 아들이다. 손주를 볼 때마다 ‘남자 주혜’라는 생각이 든다. 딸의 어린 시절과 너무나 비슷하다. 그래서 딸의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오르며 손주를 볼 때 더 행복해지는 것 같다. 이런 시절이나 장성한 지금이나 가정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은 역시 ‘자녀’라는 생각이 든다.
자녀들이 누리는 축복의 비결은 ‘부모’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특히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자세가 거의 절대적이다. 부모가 할 일이 있다. 예수님께서 자녀들을 만져 주도록 하는 일이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단시 방법이 서투를 뿐이다. 부모가 해야 할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만져 주는 일이다. 어린 시절에는 피부접촉을 많이 해야 한다. 안아주고, 뽀뽀하고, 몸 터치를 많이 해야 한다. 그럴 때 자녀가 사랑을 느낀다. 자녀가 성인이 되면 ‘마음’을 만져 주어야 한다. 마음의 상처도 만져 주고, 마음 깊은 곳의 아픔도 만져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예수님이 자녀를 만지도록 해주어야 한다. 부모가 자녀를 만져 주는 일도 소중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만져 주시는 것은 더 소중한 일이다. 부모에게는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자라날수록, 자녀의 깊은 곳을 헤아리기 어렵다. 자녀의 깊은 상처를 만져 주기는 더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할 때가 많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만져 주실 때는 다르다. 예수님은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곳까지 만져 주신다. 만지시고 위로하시고 치료하신다. 그러므로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예수님께서 자녀들을 만져 주시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부모가 현명한 부모이다.
막 10장에 보면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현명한 부모가 등장한다. 13절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했다. 13절은 ‘사람들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누구를 말할까? 많은 주석가들이 ‘어린아이들의 부모’였을 것으로 해석한다. 부모들이 비난과 반대를 각오하고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다. 왜 비난과 반대를 각오했을까? 아이들이 시끄러워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방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군중을 헤집고 앞으로 가면, 모인 사람들에게도 실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애들을 데리고 와요? 당장 데리고 가세요!” 왜 부모들이 비난과 반대가 있을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왔을까? 13절에 보면 이유가 분명히 나와 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부모들은 ‘예수님의 만져 주심’을 바랬다. 그래서 아이들을 주님께 데리고 왔던 것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그 아이들을 만져 주시기를 원했을까? 그들에게 기대감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축복을 기대했다. 예수님이 만져 주시면 자녀들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비난과 반대를 각오하고 자녀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던 것이다. “자녀 교육에 대한 헌신과 열정만큼은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라고 한다. 자신은 비록 못 먹고 못 입어도 자녀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돈을 쓴다. 이와 같은 교육의 열정이 있었기에 자원이 부족해도 우리나라가 이만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진리가 있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유산이 있다. 자녀들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기회를 주는 일이다. 예수님의 어루만지심을 경험하게 하는 일이다. 그럴 때 부모의 손이 미칠 수 없는 영역에서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부모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치유’가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만져 주심이 자녀들에게 숨겨진 ‘잠재력’을 끌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