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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완 목사
(영암벧엘교회, 한국신학목포분교 교수) |
웨슬리의 선교 사상을 분석해 보면,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설교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고아원으로, 노동자들이 쉼을 가질 수 있는 휴게실로, 교역자들의 수양소로 활용하였다. 즉 오늘의 복지회관을 겸한 교회로서 이웃과 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선교하는 ‘작은 교회'였다. 그리고 웨슬리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신성 클럽(Holy Club) 활동을 할 때 웨슬리와 그 공동체가 자신들의 경건 생활 뿐 아니라 자선사업을 꾸준히 시행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진 것이다.
웨슬리와 '작은 교회' 신앙공동체는 꾸준하게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감옥을 찾아가 위로하며 빵을 공급하는 사역을 하기도 했다. 1778년의 연회에서 교역자들이 감옥 심방을 의무화하도록 결의한 것은 메소디스트들을 중심으로 '작은 교회'가 추진한 선교사역의 중요한 결과이다.
3) '작은 교회'를 통한 정치운동
웨슬리와 그의 '작은 교회' 신앙 소공동체는 일반 자선사업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인 면에도 참여했다. 당시 사회에 만연해 있던 선거의 부정행위에 대한 경고와 또 공공연히 시행되고 있던 노예 매매 문제에 대해서도 강력히 항거했다. 이 분야에 있어서의 웨슬리의 영적 싸움은 그야말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영국 국민들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에 눈을 돌리도록 했으며 정치문제에 관하여 메도디스트들은 강단에서 자유롭게 말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설교자들이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도록 충고했다. 그렇지만 웨슬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메도디스트들은 정치에 관여했고 얼마 되지 않아 이들은 정치적인 상당한 세력이 되었다. 여하튼 웨슬리와 메소디스트들의 사회적인 활동은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웨슬리는 그의 메소디스트들과 함께 영국에서 노예매매가 1807년에 폐지될 때까지 이 운동에 참여했다. 에드워드(Edwards)는 노예제도의 반대운동에 있어서 웨슬리가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1774년에는 <노예 제도에 대하여>를 통해 노예의 상태와 노예 매매자들이 그들을 다루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폭로하는 동시에 당시에 노예제도를 정당화시키고 있는 그들의 근거를 반박했다.(((여기까지))) 그리고 노예매매에 종사하는 자들에게 채찍이나 쇠사슬 그리고 강제성은 모두 버리고 모든 사람은 인간답게 대접을 받아야 하며 친절하게 해야 한다고 강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