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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기 목사 (상리교회, 범사회문제대책운동본부 사무총장) |
‘찰스 스윈돌’이 쓴 ‘하나님의 뜻에 담긴 신비, 그 아름다움’이란 책이 있다. 책에서 어느 영화를 소개했다. 정반대의 두 사람이 결혼하여 사는 이야기다. 맥(Mac)이란 이름을 가진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이다. 부인은 여인은 베트남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유복자를 낳은 젊은 미망인이다. 두 사람이 만나 결혼했는데, 남편은 여전히 술에 빠져 살았다. 술로 인해 가정이 하루도 평화롭지 못했다. 부인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조용히, 상냥하게, 오래 참으며, 부드러운 긍휼’로 남편을 대했다. 영화는 남편이 우울증이 심해지며 나가서 술을 잔뜩 사가지고 집에 오면서 절정에 달한다. 그는 밤늦게 집에 와서 아내를 발견하게 된다. 아내는 거실에 앉아서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있었다. 남편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감동을 받은 맥이 밖으로 나가서 술을 다 쏟아버렸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술을 샀지만 다 쏟아 버렸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소!” 그다음부터 그의 삶이 점점 달라졌다. 나중에 맥은 그의 어린 의붓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게 된다. 이 영화를 소개하며 책의 저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인의 ‘긍휼의 마음’에 대해서 말했다. “긍휼의 마음이 남편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롬 11:30에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했다.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그다음에 뭐라고 했나? “긍휼을 입었는지라”했다. 좀 이상하지 않나? 순종하지 않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긍휼’을 입었다고 했다. 구약성경의 공식이 있다.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긍휼을 입게 되었다.”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순종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데 하나님은 벌을 주고 싶지 않으셨다. 그들을 구원하고 싶으셨다. 이때 필요한 것이 ‘긍휼’이다. 롬 11:30에 기록된 ‘긍휼’이라고 번역한 성경 원어는 ‘엘리오스’(ἔλιος)이다. ‘마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화를 들어서 ‘엘리오스’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어느 임금이 종들과 결산을 하고 있었다. 그때 1만 달란트라는 빚을 진 사람이 끌려왔다. 1만 달란트는 요즘 화폐로 환산하면 6조원이 넘는다. 그런데 그가 도저히 빚을 갚을 수가 없는 사실을 알고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다. 임금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에게 ‘긍휼’을 베푼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이때 긍휼을 베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일까? ‘감옥’밖에 없다. 그러나 긍휼을 베풂으로 감옥이 아니라,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그렇다. 우리의 현재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살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심으로, 진노를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기반으로 ‘성도’를 정의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쉬지 않고 하시는 일이 있다. ‘긍휼’을 베푸시는 일이다. 롬 11:32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여기 보시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신다.”는 표현이 나온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불순종의 상태에 가두어 두셨다’는 말인데 이게 무슨 뜻일까?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마치 하나님이 사람들을 불순종하도록 유도하셨다고 해석한다. 이 말씀은 사람들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로 ‘그냥 내버려두셨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아들이 하나 있는데 지겹게 말을 안 듣는다. 혼을 내도 말을 안 듣는다. 하도 말을 안 들어서 ‘벌’을 내리기도 했다. 그래도 말을 안 듣는다. 그러자 아버지가 내린 결단이 있다. “아무리 해도 말을 듣지 않으니, 그냥 내버려 두자!”는 거다. 아들의 변화에 대하여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아들에게 ‘긍휼’을 베풀기로 했다.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 아들을 내버려 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는 마치 이와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자녀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도 말을 듣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그냥 방치하셨다. 만일 이대로라면, 진노를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진노를 당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새인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고, 세리는 죄인 취급을 받았다. 먼저 바리새인은 일어서서 큰 소리로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도둑질도 안 하고, 불의를 행하지도 않고, 간음을 하지도 않고 저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1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항상 드리나이다.” 기도하면서 자기 자랑만 했다. 그런데 세리는 제대로 눈을 들지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로 가슴을 치며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이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바리새인은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자기의 의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세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의로운 행실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감히 의롭게 될 수 없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야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바리새인처럼 변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자기도 모르게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만해진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하면 감동이 되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감동이 없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눈물이 흘렀는데 이제는 무덤덤하다. 그리고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바리새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세리와 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