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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완 목사
(영암벧엘교회, 한국신학목포분교 교수) |
2) '작은 교회' 를 통한 사회사업 운동
웨슬리의 '작은 교회'는 에드워드(Edwards)가 지적한 대로 "가난하고 당시의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있던 계층의 사람들에게 가장 친밀감을 주는 위대한 친구" 였다. 웨슬리는 논문들과 설교문들 속에서 가난과 실업은 18세기의 사회적 불평등 체제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당시에 가난의 이유가 단지 게으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악하고 악마적인 말이라고 선포하면서 오히려 일거리가 부족하기 때문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시기는 전쟁, 높은 물가, 흉년 그리고 빈곤 등으로 특징된다. 요한 웨슬리는 그의 논문에서 당시 영국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자세히 분석하였다.
왜 그들이 육식을 못하는가 하면 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실업률이 늘어나기 때문에 필수품, 특히 음식물의 물가가 상승하고 있다. 과거에 50명을 고용했던 고용주들이 이제는 겨우 10명을 고용하고, 과거에 20명을 고용했던 고용주들이 이제는 겨우 한 명 혹은 아무도 고용하지 못하는 실정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웨슬리는 경제적 빈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잘 조직된 고용체제를 만드는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 부자들의 낭비 때문에 썩혀 버리 는 음식이 많아서 식료품 값이 비싸다고 보았고, 영국에서 산출되는 밀 의 절반 가량이 부자들의 낭비로 버려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영국 사회 안에 편만해 있는 음주, 밀수, 도박, 도적(gang)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특히 1767년 연 회에서는 선거에 따르는 부패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치, 곧 공정한 선거를 호소하는 팜플렛을 발행하기도 했다.
웨슬리는 더 나아가 자선사업 뿐 아니라 민생사업도 추진하였는데, 이를테면, 편물공장, 의료원, 빈민은행, 빈민을 위한 교육 선교사업도 실시하였다. 급기야 1748년에는 순회 전도자들의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킹스우드(Kingswood)에 학교를 세웠고, 광부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학교를 세웠다. 뉴캐슬(Newcastle)에는 교회의 부설 고아원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