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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원 원장(예송음악학원) |
독서 에세이 모임 선생님 중 소녀같은 분이 있다. 어느 날 “정원샘. 여기 한번 가볼래요?”라는 링크 하나를 툭 보내주셨다.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 조용한 여행을 좋아하게 됐고 서른 중반이 들어서며 화려한 것보다는 사유하는 인문학 여행을 선호하게 됐다. 음악가와 철학가들 또한 산책 속에서 사유를 즐기지 않았던가. 가을 수채화처럼 펼쳐진 나무들을 보며 걷는 여행이라니….
하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계획이 모두 틀어진 상황이었다. 트레킹 신청자는 거의 없었으며, 링크를 보내주신 이 선생님도 친정아버지 생신 때문에 오지 못한다는 것, 진행하려던 트레킹도 취소한다는 것이었다. 약간 얼굴이 붉어지려던 찰나, 불만을 터뜨리는 것보다 순리에 맞게 흘러가는 대로 두자는 마음에 알겠다고 했다. 트레킹 대신 타오르는 강 문학관을 둘러보고 저녁 토크쇼를 들었다. 우리 땅 걷기 신정일 선생님과 나해철 시인이 오셨다. 역사에 대한 진중한 말씀과 표정, 이야기가 깊어질 때마다 꿈틀대는 눈썹. 121권의 저서를 쓴 작가는 역시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어를 먹으며 뒷풀이를 잠시 하고 서둘러 숙소로 들어갔다. 다음 날 산에 잠시 오르고 신 선생님과 잠깐 이야기 나누던 도중 “목포역으로 나를 좀 데려다줄래요?”라고 물으셨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고, 만화가 정용연 선생님도 함께했다. 가는 길에 신 선생님은 역사의 흔적 몇 곳을 둘러보자고 하셨다. 우리는 300년이 넘은 장승을 보고, 고려시대의 사찰을 찾았다. 그러던 도중 기독교인인 나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불교보다는 역사에 주안점을 두고 방문한 것이었다. 숙종 때 지어진 장승은 근엄하고 위엄 있어 보였다.
가는 도중 구글 지도와 네비게이션에 나오지 않은 까닭에 나의 suv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비좁은 돌길에도 들어가 버렸다. ‘선생님…. 이제 그만 포기할까요...’40분 넘게 차를 돌려 다시 갔다. 산속 한가운데서 오지를 유랑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마을로 다시 가보자….”이렇게까지 가야 하나라는 마음이 들던 순간이었다. 어리석고 인내심 부족한 인간의 민낯이었다.
“거기요~ 사람 없습니까? 없습니까?” 우렁차고 산을 울리는 신 선생님 목소리. 개짖는 소리가 연신 들린다. 그때 정용연 선생님은 나보고 이쪽에 오라며 손짓을 했다. 깊은 산골에 작은 카페같은 곳이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미 신 선생님은 들어와 계셨다. ‘이런 우연이…’ 알고 보니 그분은 DBS 방송 최대휴 기자님이었다. 그분은 낯선 이방인들에게 귤을 담아주고 친절히 커피까지 내려주셨다.
산골 깊은 곳에서 크레마가 듬뿍 올려져 있는 커피라니. 병풍같이 산이 둘러싸고 있는 이곳에서 음악회도 열고 인문학 강연도 한다고 한다. 기자님답게 인곡마을 문화유산을 PPT로 열어서 보여주었다. 숙종 제12호, 제17호를 보며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신 선생님의 통화로 오신 영화문화관광재단 전고필 선생님이었다. 그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에는 몽탄에 있는 두암식당에 갔다. 가을밤이 더욱 깊어지는 저녁이었다. 인연이 인연을 만들고, 그 속에서 듣지 못한 인생과 철학이 오고 갔다. 하나님께 감사한 시간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계획이 틀어졌고 트레킹도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더 복된 것들을 선물해 주셨다. 새로운 인연들과 의미 있고 깊은 사유의 시간을 예비해 주신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신 선생님이 좋아한다는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들었다. 브람스 교향곡 중 유일하게 단조로 끝나는 작품이다. 하강하는 3도 음정이 반복되며 마치 가을의 쓸쓸함을 연상케 한다.
바래다 드리고 보니 저녁 9시가 넘었다. 가다가 목이 너무 말라 생수를 사서 옆에 있는 고양이에게도 조금 주었다. 너도 얼마나 목말랐겠니….
인간은 정해진 틀에서 살아가다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우연히 좋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행복해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다른 우주들과의 만남으로써 그곳에서 또 한 번의 궤도를 그린다. 그리고 2026년 10월의 가을밤은 더욱 아름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