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21. 목포 교회의 기둥

<기획특집> 유진 벨 선교사



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김윤수, 그의 백팔십도 달라진 회심으로 시작해 그의 신자됨과 교회에 대한 충성스런 일생은 목포와 전남의 130년 기독교 역사의 초석이 되었다.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사울이 바울이 되어 세계 선교 역사의 기초를 닦았듯이, 김윤수는 목포 광주 전남의 초창기 교회를 세우고 섬겼던 참 훌륭하고 탁월한 일군이었다. 이 지역의 기독교를 일군 개척자 유진 벨과 오웬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며, 미남장로교 조선선교회가 광주도 순천도 선교 센터를 개설하고 전남 전역에 교회와 병원 학교 사역을 일구는 데 참으로 기둥같은 역할을 도맡아 하였다.
 
1860년 서울 계동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난 김윤수는 원산에서 총순으로 일하다 개항기에 맞춰 1897년 10월 4일 발령에 의해 목포로 왔다. 38세에 목포에 와 지금의 경감에 해당하는 비교적 높은 관직의 경찰관으로 있으면서, 동시에 양조장 사업도 병행하였다.

개항 이후 목포는 나라 밖에서 일본인들은 물론 전국 각지의 조선인들도 몰려드는 신흥 성장 도시였다.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하던 목포가 갑작스럽게 사람이 늘어가고 교역과 상업이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유흥 산업도 발전하였다. 김윤수가 부업으로 하는 술 장사는 그야말로 하루 하루가 늘 대목이었다.

김윤수가 기독교 신앙을 접한 것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시작한다. 모친이 어느날 손에 가시가 박혀 종기가 심해지자, 목포 진료소를 찾았다. 그곳에서 의사이며 선교사 오웬을 만났다. 오웬은 치료와 더불어 그녀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오웬의 치료와 기독교가 전해주는 생명의 능력을 체험하고 아들 김윤수를 전도하게 된 것이다. 김윤수는 예수를 믿게 되었고, 어머니는 물론 자기의 아내와 장모까지 함께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의 회심과 영적 성장은 놀라왔다. 그가 세례 받는 과정에서 보인 결단과 각오는 너무도 훌륭했다. 그가 남들과 같이 세례 지원하며 문답을 할 때 선교사들은 그의 행적을 문제삼아 보류하였다. 술 장사를 하는 그에게 세례는 부적합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벨과 오웬 등 당시 선교사들이 전도하고 예수를 영접하기를 독려하며 강권하였지만, 교회의 정교인으로서 자격을 얻는 데에는 분명하고도 엄격했다. 세례 교인이 되려면 분명한 신앙고백과 함께 생활과 삶이 완전히 탈바꿈 되어야 했다. 하늘 나라의 도리와 삶에 저촉되는 세상에서의 행실과 내용은 다 버려야 했다. 진정 다시 태어나는 인생이어야 했다.

교회 교인으로 인정받고 자신도 세례 교인이 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은 있었으나, 그렇다고 양조장 사업을 폐기 처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매일 매일 술 장사로 인해 돈방석에 앉아 그날 저녁에 벌어들인 돈을 세느라 밤새 잠을 못 이룰 정도였는데, 누가 쉽게 이를 포기하고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김윤수는 그랬다. 그는 돈을 버리고 예수를 택해 살기로 결행했다. 술 사업을 정리하고 세속의 부귀 영화로부터 뒤돌아 서기로 결단하였고, 정녕 예수의 가르침과 반하는 삶의 습관과 생활로부터 완전히 돌아섰다. 1900년 그의 나이 41세때였다. 목포 교회 설립 3년 차를 지나며 교회가 첫 결실을 맺을 때, 김윤수도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열매로, 신실한 주의 일군으로 새롭게 거듭났다.

그의 회심과 새 인생에 대한 각오는 이름을 바꾸는 데서부터 남달랐다. 22세나 연하였던 부인 정금계 권사와의 사이에서 1남 3녀의 자녀와 함께 기독교 집안을 일구웠던 김윤수는, 자신의 본관을 ‘김해’에서 ‘낙원’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제는 자신의 본이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 낙원이라는 뜻에서 ‘낙원 김씨’라 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여자 아이는 사람 취급도 안하고 이름도 아무렇게나 부를 뿐, 전혀 독자적 고유성도 부여하지 않던 시절에, 성경의 가치에 어울리게 딸들에게도 이름을 부여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의미로 세 딸의 이름을 명은(明恩, 밝은 은혜), 홍은(弘恩, 넓은 은혜), 정은(正恩, 바른 은혜)라 하였다. 또 독자 아들의 이름도 일생(一生)이라 하였으니, 일평생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의미일 것이다.



김윤수 한 사람만으로도 성공한 사역

그는 이후 사업은 물론 경찰 공무직도 버리고, 선교사 조사가 되어 전적으로 교회에 충성하는 것으로 사도 바울과 같은 새로운 일생을 시작하였다. 그의 신실하고 헌신적인 삶과 믿음을 전킨 선교사는 ‘목포에서의 선교 사역이 오직 한 사람의 회심자 밖에 없었음에도 가치가 있는 사역이었던 것은 바로 다름아닌 김윤수라는 회심자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레이놀즈 역시 그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남겼다.

그 집 가장의 이름은 김윤수인데, 사람들은 “김 반장”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가 경찰 반장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활발한 성격의 사람인데, 40년 동안 전력을 다해 귀신을 섬겨왔다. 그는 술을 만들어 팔았고, 밤새도록 놀음을 했으며, 춤추는 여자들을 사고 팔기도 했었다. 심지어 그는 한 때 세 명의 여자들을 데리고 살았었다. 그는 목포에서 경찰 반장으로 3년간 일한 후, 그는 직장을 잃었고, 유진 벨 선교사가 인도하는 모임에 참석했다가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지금 그는 자신은 전라도의 지사와도 자리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힘있게 말하고 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오랫동안 진정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 왔다. 수개월 동안 근신하는 삶을 살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주류 사업을 그만둔 후에 그는 세례를 받았으며, 현재는 목포 교회의 지도적인 인물이다. 그는 교회에서 가장 훌륭한 청중이다. 결코 자기 자리를 비우는 법이 없을 정도이다. 그는 기도에 열심이고, 예배 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열심히 그리고 능력있게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교회에 아낌없이 헌금한다.

지난 수요일 밤, 그는 사실상의 무기명 투표에 의해 집사로 선출되었다. 그는 남달리 진보적이다. 그는 상투를 잘랐으며, 외국 모자를 쓰고 다닌다. 또한 그는 미국산 손목시계와 벽시계를 좋아하고, 멋진 외국산 랜턴을 손에 들고 가족들을 인도해 저녁예배에 나온다. 그의 슬로건은 “오직 성령의 도움으로”이다(레이놀즈, 더 미셔너리, 1902년 10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목포 일대에서 시작한 초기 사역이 김윤수 한 사람 포교한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하였듯이 그의 회심과 변화는 대단했다. 그러니 유진 벨 선교사는 자기의 조사로 임명하여 교회 사역과 선교 확장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변창연에 이어 김윤수를 자신의 일군으로 추가 선임하고 이제 그에게 더 큰 임무를 부여하였다 김윤수를 통해 벨 선교사는 목포 교회는 물론 광주 전남 지역 전역에 교회를 확장하는 일을 펼쳐 나갔다.

김윤수의 활동은 너무도 훌륭했다. 1901년 로티의 사망으로 목포 교회를 뒤로 하고 유진 벨이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 공백기를 오웬과 레이놀즈를 도와가며 목포 교회를 이끌었고, 1904년 광주 선교부를 개설할 때도, 1913년 순천 선교부를 개설할 때도 벨 선교사를 대신해서 홀로 현지에 가서 준비과정을 도맡아 수행했다.

광주 선교부 준비를 진행했고, 1904년 성탄절 이후 광주 교회를 시작하면서는 광주의 신자로 일군으로 또한 충성하였고, 후배 최흥종과 함께 광주의 첫 장로가 되었다. 그의 여생은 하나님께 바친 일생이며 그로 하여 전라남도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생명의 도리가 펼쳐졌다. 가히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 버린(마 17:20) 하나님나라의 일군이었다. 유진 벨의 충실한 사람, 김윤수는 겨자씨 한 알보다 큰 믿음의 일생을 살다 1919년 그가 그토록 소원하던 본향 낙원에 갔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