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정원 원장 (예송음악학원) |
광복절 81주년을 맞아는 우리는 다시금 일제시대를 돌아봅니다. 당시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억압받았고, 교회 음악 또한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함께 담아냈습니다. “일제 시대 속 한국 교회 음악은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첫째, 당시 교회 음악은 일본 군가와 창가의 곡조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청일전쟁을 찬양하던 일본 군가 〈용감한 수병〉의 선율이 한국 교회 성가〈부럽지 않네〉로 바뀌어 불렸고, 철도 개통을 기념한 일본 창가〈철도 창가〉는 성경 암송용 노래〈성경 목록가〉로 변형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음악 교육 기반이 약했고, 새로운 곡을 보급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일본 군가나, 선율을 차용하면, 사람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익숙한 곡조를 빌려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지키려는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둘째, 교회는 찬송가 개정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는 가운데서도 선교사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찬송가집을 편찬했습니다. 감리교 중심의 신정찬송가(1931), 장로교 중심의 신편찬송가(1935)가 대표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 작사곡도 일부 포함되었는데, 남궁억의〈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은 민족적 정서를 담아내려는 시도로 평가됩니다. 남궁억 선생은 언론과 교육, 신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한 인물이었습니다. 황성신문 사장으로서 외세 침략을 폭로하고, 무궁화 보급 운동을 통해 애국심을 심었습니다.
“주여 이 나이 환갑이 넘은 기물이오나 이 민족을 위해 바치오니!
아무리 혹독한 왜정 하 일지라도 변절하지 않고
육으로 영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1922년 9월 마태복음 9장 35-38을 묵상하시고 드리신 기도문 중에서>
그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조차 민족과 신앙을 위해 헌신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33년, 개신교인들과 함께 독립운동 비밀결사 ‘십자당’을 조직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1940년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기도와 노래, 그리고 피 흘린 헌신은 우리에게 살아 있는 유산이 되었습니다.
셋째, 교회 음악은 민족 정체성을 지키는 도구였습니다. 일본은 한글 사용 금지, 일본어 강제, 창씨개명 등으로 민족혼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찬송가와 성가를 통해 한국인의 언어와 정서를 지켜냈습니다. 교회 음악은 민족적 저항의 장이었습니다. 광복 81주년을 맞은 오늘, 우리는 그들의 정신과 노래를 기억하며 신앙과 민족을 지키는 길에 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