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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제1부 어머니는 바보야 45회

2026-08-27 13:32 | 입력 :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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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
윤기
전) 목포공생원 원장
공생복지재단 회장
- 1942년 목포 출생
- 중앙신학교(現 강남대학교) 사회사업학과를 졸
- 아동복지시설「목포공생원」의 원장
- 정신지체장애인시설「공생재활원」을 설립
- 한국사회복지사협회 부회장‧회장(1987年~2001年)을 역임
- 1989년 일본 최초의 재일동포를 위한 노인복지시설「고향의 집」을 건립
- 1978년 제22회 소파상등 수상다수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이사장
- 저서는《김치와 우메보시》, 역서는《괴짜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 《고령사회 이렇게 살아보세》


공저자 윤문지
공저자 윤문지(타우치 후미에)
-1949년 일본 오사카 출생
- 쿄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
- 1972년, 한국 목포로 건너와 목포공생원 생활지도원 역임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 이사, 사회복지법인 윤학
자공생재단 이사,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제3회 여성휴먼다큐멘터리 대상에《양이 한 마리》로 입선
- 1982년《나도 고아였다》로 일본 크리스천신문 제5회 아카시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


방영이 끝나자 NHK로 진화가 쇄도했다.
맨 처음 전화는 하시모토(橋本) 관방장관(官房長官)으로부터였다. 어머니와 나는 관방장관이란 직책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한국의 문화공보부의 일부 역할과 대통령 직속의 청와대 대변인과 총무부의 역할이 합쳐진 것임을 후에 알게 되었다.
잇달아 전화가 걸려왔다. 그중에 노리타니(車谷)라고 자신을 밝힌 사람의 전화도 있었다. 텔레비전을 봤는데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쾌히 승낙했다.
NHK 홀을 나온 뒤 도쿄역에서 전차를 탔다. 플랫폼이 너무 많아서 눈이 핑핑 돌았다. 어머니는 곧 목적한 전차를 찾아냈다. 블루(BLUE) 전차였다. 아카바네(赤羽) 역에서 하차한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몇 분을 달렸다. 택시는 작은 공원 앞에서 멈췄다. 그 공원이 약속 장소인 듯했다. 어머니는 확인하듯 잠시 주위를 휘 둘러본 후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갔다.
2층 양옥집 앞에서 발을 멈췄다. ‘노리타니’란 문패를 확인하곤 벨을 눌렀다.
“역에서 전화하셨으면 모시러 나갔을 텐데요. 용케 찾으셨군요.”
2층으로 안내되어 초대면의 인사를 나눴다. 어머니는 한사코 고개를 숙이고 계셨다. 이제야 고개를 드시는구나 싶으면 또 뭔가 이야기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좋을지 몸 둘 바를 몰랐다. 어머니를 흉내 내려고 해도 머리가 숙여지질 않았다. 일본식 인사법이 몸에 배지 않아서인지 어색할 뿐이었다. 나중엔 두 사람의 인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응접실 중앙에는 육중한 테이블이 놓여 있고 벽에는 시원한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아름다운 꽃꽂이가 방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노리타니 씨는 인정미가 있어 보였다.
“오늘 아침 텔레비전에서 봤습니다. 패전(敗戰) 후 우리 가족은 생활이 어려워 한때는 자살까지 생각했었는데. 부인은 남편도 없이 그 수많은 고아를 키우셨다니 정말 훌륭하십니다. 남편의 소식은 아직 못 들으셨는지요?”
“네, 소식이라도 들으면 좋을 텐데….”
어머니는 조심스레 대답하고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녹색의 차는 아무 맛도 없고 쓰기만 했다.
‘이런 쓴 물을 고급스러운 그릇에 담아 마시다니 일본인은 참 이상한 데 사치를 부리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두 분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노리타니 씨는 이북 정주가 고향이라고 했다. 정주라면 유명한 시인. 김소월의 고향이 아닌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김소월. 그 소월도 정주가 고향이다. 그런데 노리타니 씨는 고향의 위대한 선배, 아니 한국이 낳은 천재 시인을 모르고 있었다.
노리타니 씨는 자신의 고난에 찬 인생을 털어놓았다.
“저는 14세 때 일본으로 건너왔습지요. 돈도 기술도 없어 철공장에서 막일을 했습니다. 밑천이라곤 이 몸뚱이 하나였습니다. 1943년부터 그 이듬해라고 기억됩니다만, 북한에 살고 있던 부모와 형제가 모두 남한으로 이사를 했다는 편지가 왔더군요. 그 무렵 도쿄는 밤낮으로 B29의 폭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방공호로 피난하면서 그만 고향에서 온 편지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는 저도 젊었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지나쳤는데 결국은 그것이 부모님께서 제게 보낸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노리타니 씨는 옛일을 회상하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전쟁이 끝나고 살기 위해 별의별 고생을 다 한 끝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때 아내의 친정에선 제가 한국인이란 이유로 거센 반대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한 칸짜리 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차렸습니다.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만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지금은 렌즈 공장을 경영하고 공원도 200명쯤 됩니다. 렌즈는 유명 메이커에 납품하고 있고 장차 꿈은 노리타니 카메라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노리타니 씨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반씩 섞어 사용하는 까닭에 나도 대충은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업도 안정 궤도에 오르고 세 아이도 다 크고 나니 부모님과 형제들이 보고 싶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많아졌습니다. 아이들에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다는 걸 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다행히 한·일 양국의 국교도 정상화되어 아는 사람들 통해 이곳저곳 수소문해 보았습니다만 찾을 길이 없군요.”
노리타니 씨는 깊은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사업상 부득이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현재의 성을 따로 갖게 되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다음 46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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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명 |2024.11.1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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