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연재] 어머니는 바보야 29회
  • 공저자 윤기
    공저자 윤 기

    전) 목포공생원 원장

    공생복지재단 회장 

    - 1942년 목포 출생

    - 중앙신학교(現 강남대학교) 사회사업학과를 졸

    - 아동복지시설「목포공생원」의 원장

    - 정신지체장애인시설「공생재활원」을 설립

    - 한국사회복지사협회 부회장‧회장(1987年~2001年)을 역임

    - 1989년 일본 최초의 재일동포를 위한 노인복지시설「고향의 집」을 건립

    - 1978년 제22회 소파상등 수상다수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이사장

    - 저서는《김치와 우메보시》, 역서는《괴짜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 《고령사회 이렇게 살아보세》가 있다.



    공저자 윤문지(타우치 후미애)

    공생복지재단 이사장

     

    -1949년 일본 오사카 출생

    - 쿄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

    - 1972년, 한국 목포로 건너와 목포공생원 생활지도원 역임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 이사, 사회복지법인 윤학

    자공생재단 이사,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제3회 여성휴먼다큐멘터리 대상에《양이 한 마리》로 입선

    - 1982년《나도 고아였다》로 일본 크리스천신문 제5회 아카시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




    정 총무는 막무가내였다.

    “평화 라인을 침범한 배에 타는 게 어째서 안 됩니까?”

    “제 말뜻은 그게 아니에요. 모리 씨는 지금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 있는데 놀러 가자니요? 그럴 여유가 있으시겠어요?”

    어머니는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 이 어머니의 신조기도 했다.

    두 사람의 옥신각신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리 씨가 중재하듯 나섰다.

    “괜찮습니다. 당국의 허가를 받으면 상관없을 겁니다. 부인이 이렇게 고생하고 계시는데 같은 일본인으로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 드려야죠.”

    모리 씨는 쾌히 수락했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왔다. 8월 15일,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이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어린아이 머리만 한 주먹밥을 뭉쳐서 양동이에 담고 계셨다. 보모 선생들도 총출동하여 준비 중이었다. 상급반 아이들은 배까지 리어카로 식수며 먹을 것을 운반했다. 원에는 초등학교 3학년생 이하 원아들과 유치부 꼬마들이 남았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되어도 배가 나타나지 않았다. 배가 지나갈 적마다 이번엔 오나 보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길 여러 번,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모리 씨의 배는 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모처럼의 캠프라고 이렇게 들떠 있는데 당국의 허가가 나지 않은 걸까? 어머니는 조바심 나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배가 온다아!”

    “봐아,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고 있잖아. 이번엔 진짜다.”

    원아들은 말할 것 없고 어머니까지 정신없이 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와아, 무지 크다.”

    “일본 배야.”

    “학교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일본 배는 속력이 빨라서 우리 해역에 침입해서 고기를 잡아도 해군에게 붙잡히지 않는대.”

    “야. 그렇담 정말 빠르겠구나.”

    아이들은 저마다 떠들었다. 너나 할 거 없이 기쁨에 넘쳐 있었다. 다투어 승선했다. 나는 1등으로 배에 올라타는 데 성공했다.

    과연 배는 빨랐다. 앞서 달리는 배를 차례차례 추월했다. 이런 속력이라면 장도(長島)까지 20분도 채 걸리지 않을 듯싶었다.

    호루라기가 울렸다. 윤 선생님의 집합 신호다.

    “지금부터 수영 대회를 실시하겠다.”

    육도가 500m쯤 남았을 때 윤 선생님은 참외를 계속해서 집어던졌다. 수박도 던졌다 참외와 수박은 바닷물 속에 일단 잠겼다가 떠올랐다. 윤 선생은 연달아 바다를 향해 던졌다.

    아이들도 점프하여 줄줄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참외와 수박은 동작 빠른 놈의 차지였다. 건봉이, 석오, 인철이. 온길이가 선두였다. 아이들의 헤엄치는 모습을 배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마치 집오리 떼의 행렬 같았다.

    짐을 내리기 위해 배는 일단 심 모퉁이로 돌아갔다. 짐을 풀어놓고선 재차 바다로 나가 닻을 내렸다. 섬에 당도한 아이들은 낚시질이며 낙지 잡기, 게 잡기에 정신이 없었다. 논에서는 우렁이도 잡혔다. 그것들은 모두 훌륭한 찬거리가 되었다. 점심밥 맛이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바닷가에서 먹는다는 것, 더욱이 실컷 뛰어논 후라 배가 고플 대로 고파 어떠한 산해진미도 비길 수 없었다. 모두 얼굴에 밥알을 묻히며 큼직한 주먹밥을 게걸스레 먹었다.

    어머니와 보모들도 아이들과 동화되어 즐거워했다. 평소엔 그렇게도 말이 없던 어머니도 즐거운 웃음소리를 해변에 날리고 있었다. 얕은 물에서 수영하는 어머니는 정말로 천진한 얼굴이었다.

    오후엔 더 재미있었다. 배에 먼저 올라탄 아이들이 나중에 온 아이들을 바닷물에 밀쳐 넣었다. 그러면 바다에 떨어진 아이는 집요하게 배로 올라오려 하고, 결국엔 배에 타고 있던 아이들까지 바닷물 속으로 곤두박질했다. 무척 위험한 놀이였지만 스릴 또한 있었다.

    여름 해는 길었다. 우리는 연신 수영을 하고 노래도 불렀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아니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해했다. 놀이에 지친 아이들을 태운 배가 대반동 부두로 돌아온 것은 오후 5시 무렵이었다.

    “오늘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럼 조심해 가세요.”

    정중히 인사를 나눈 뒤 어머니와 아이들은 배에서 내려 공생원으로 돌아왔다.

     

    고아들인 주제에

     

    정 총무와 나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은 뒤에 남아 부두를 떠나는 배를 지켜보고 있었다. 스크루가 회전하자 기계 소리와 함께 하얀 물거품이 일었다. 바다 한복판의 다이빙대에서 놀고 있던 젊은이가 선미(船尾) 쪽으로 헤엄쳐 다가갔다.

    “아부나이(위험해)!”

    모리 씨는 순간 일본어로 외쳤으나 그들은 듣지 않고 계속 접근했다. 스크루에 휘말리기 직전이었다. 당황한 모리 씨는 긴 장대를 들어 그들을 밀어냈다 장대에 밀려난 젊은이들이 분통한 얼굴로 부두 쪽으로 헤엄쳐 나갔다.

    “눈이 없나! 사람을 장대로 밀어내다니, 망할 X!”

    흥분하여 그들 중 한 명이 모리 씨에게 주먹 한 방을 강타했다. 모리 씨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붉은 코피가 쏟아졌다. 정 총무와 원아들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음 30회에 계속)

  • 글쓴날 : [25-12-15 15:25]
    • admin 기자[honamc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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