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조지아 아르메니아 방문기 /목포권기독교 근대역사기념사업회 홍보이사 권용식목사(성문교회)
  • 권용식
    권용식 목사
    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관 홍보이사
    (성문교회)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하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큰 공헌은 조선말기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변화를 촉진 시켰다.

     

    조선말 격변기에 선교사이자 의사 알렌의 입국과 선교사 언더우드의 내한은 큰 변화를 불러왔다. 특히 탄압으로 수많은 희생을 받아오던 천주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대대적인 조선 정부의 환영으로 선교사 사역이 시작되었다.

     

    그 시작의 원인은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었다.

     

    1884년 12월 4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가 우정국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자 청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던 민영익이 칼에 찔려 치명적인 상처로 죽게 되었다. 당시 미국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알렌이 민영익의 상처를 외과 수술로 치료 했다. 알렌은 민영익을 살려냈고, 이 사건은 서양 외과 수술이 조선에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도입된 사례로 기록된다. 당시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고종의 외사촌 동생으로서 민씨 척족 세력 의 중심 인물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알렌은 고종으로부터 신뢰를 얻었고, 이후 조선의 의학 발전 과 근대화에 기여하게 된다. 제중원 개원에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1885년 4월 개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의 설립 목적에는 의학생 교육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886년 3월 29일 개교한 한국 최초의 서양 의학 교육 기관인 제중원의 학당에서 언더우드는 영어, 물리, 화학 등 의예과 과정의 과목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한다. 언더우드선교사와 아펜젤러선교사입국 과정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언더우드선교사는 1884년에 갑신정변이 터지는 바람에 후유증으로 외국인 입국이 막혔으며, 언더우드는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입국 시기를 기다렸다.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감리회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함께 호머 헐버트의 도움을 받아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양반과 상민의 신분사회 조선은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당시 곤당골 백정 박성춘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임금을 치료하던 어의 알렌선교사가 천민인 자기의 병을 고쳐주자 큰 감동을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교회에서 백정이 예배에 참여하자 큰 반발이 일어났다. 양반들이 반발한 것이다. 양반과 상놈이 한곳에서 예배드리기 어렵다는 논리였다. 결국 양반들이 따로 나가 예배를 드렸으나 후에 선교사들의 설득과 성경을 공부한 후에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함께 교회에 들어와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조선말기는 한국 여성의 신분이란 아주 비천하며 특히 천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름도 없었고 배움의 길도 열어주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여성들을 배움의 전당으로 인도했다. 병원 사역을 하던 의사 선교사들은 여성 환자들을 진료할 수가 없었다. 피부접촉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미국에 여성의사를 청원하였고 그 결과 메리 스크랜튼 여의사가 한국에 오게되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은 교회와 병원 그리고 학교를 삼각편대로 활용하여 전도를 하였다. 병원은 무료였고 최고의 의술로 병자들을 고치자 늘 환자들로 넘쳐났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의 여자들을 학교로 초청하여 여성교육 입문을 시작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서울도성에 여자학교 이화학당을 세우고 전라도 지역역시 지방마다 목포 정명여학교 광주에 수피아 여학교 전주에 기전여학교 순천에 매산 여학교를 세워서 여성교육에 문을 열었다.

     

     

    조선말기 우리나라 언어 한글교육에서 선교사들과 교회의 역할이 크게 돋보인다.

     

    조선시대 모든 행정문서는 한문으로 되었으며 과거 시험도 사서삼경 한문을 통해 시험을 치루고 한글은 언문이라하여 천시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성경을 번역하려는 과정에서 한자로 일반 대중들을 가르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한글은 아주 큰 발견이 되었다. 한글자체가 표음문자로 소리나는 대로 읽으면 일상에서 쓰이는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크게 집중한 것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이런 노력은 큰 호응을 얻었다.

     

    지금의 우리나라가 이렇게 문맹률이 낮은 이유는 한글이라는 아주 효율적인 언어 덕분이다.

     

    교회는 성경을 한글로 가르치고 찬송가 역시 한글로 기록하여 예배때마다 불렀다. 조선사회가 천시하고 사용하지 않던 한글을 교회가 대중의 언어로 보급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 민주주의의 시작은 교회다. 교회의 민주적인 대표 선출 방식이 최초로 서울 새문안 교회에서 시작된 것이다.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언더우드는 14명의 세례교인을 회의장에 모으고 그들의 대표인 장로 선출을 위한 선거를 하였다. 그 시기가 1877년 10월 7일이었다. 조선반도 최초 장로 선출 선거(민주주의)였다. 이 사건은 한반도 최초 선거 1948년 제헌국회보다 71년이 앞선다.

     

    조선정부부터 그 이전 고려시대에도 한번도 그들의 대표를 선거라는 방식으로 선출해 본적이 없었다. 새문안 교회 장로 선출이 민주주의의 최초가 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기의 대표를 선출함에 있어서 서로 의견을 충분히 개진하고 토론하여 투표로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이다. 봉건주의는 군주가 주인이고 군주 1인 독재가 통치를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백성이 주인의 자리에서 대표를 선출하고 대표는 정해진 기간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장점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바로 교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조선 말기는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 종교인 기독교를 배척했다. 그러나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회와 병원 그리고 학교라는 팀 선교로 큰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특히 서양의 의술은 백성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학생들에게 배움의 도전 의식을 심어주었다. 조선말기 양반들이 대대적으로 기독교로 입문을 하였다.

     

    봉건국가에서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아주 크다고 볼 수가 있다.

     

    이승만, 이상재, 윤치호, 서재필, 이기풍, 등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지도자들이 되었다.

  • 글쓴날 : [25-11-13 10:00]
    • admin 기자[honamc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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