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할례
  • 홍석기 목사
    홍석기 목사
    상리교회
    범사회문제대책운동본부 사무총




    병원에 가면 꼭 만나는 사람이 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이다. 왜 의사들은 흰 가운을 착용할까? 흰색이 ‘청결, 생명, 순수, 결백, 친절’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의사의 복장으로는 ‘흰 가운이 최고’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의과대학의 ‘샤카이브 레만’ 교수팀의 연구에 의하면 “의사와 환자 모두가 흰 가운에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래서인지 의사들은 진료할 때뿐 아니라 의사들만 모이는 세미나에서도 흰색을 즐겨 입는다고 한다. 하루는 필자의 사위가 이런 말을 했다. “어디를 가든지 의사는 눈에 금방 들어옵니다. 어디 놀러 가려고 모일 때든지 세미나에 가려고 모일 때든지 금방 티가 납니다.” 그래서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하는 대답이 “의사들 특유의 표정과 스타일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의사들은 평상시에도 옷을 주로 흰색 계통으로 잘 입는다.”고 했다. 지난 2008년 미국의 한 의과대학에서 세미나가 열렸다. 의사만 모두 149명이 참석했다. 이때 의사들 모두가 흰 가운을 입고 왔단다. 흰 가운이라도 깨끗한 옷을 골라 입고 왔겠지요. 그때 의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들이 입고 있던 흰 가운 149벌을 수거하여 세균이 검출되는지를 조사했다.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옷에서 ‘포도상 구균’이 검출되었다. 어떤 가운에는 항생제도 잘 듣지 않는 ‘독한 균’이 묻어있었다. 이 연구의 핵심은 ‘청결’의 상징인 흰 가운이 사실은 각종 세균이 서식하는 소굴일 수 있으며 다른 환자에게 세균을 전파하는 감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운을 깨끗이 빨아 입고, 정기적으로 소독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겉으로는 청결해 보여도 실제로는 세균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에 유대인들이 그랬다. 유대인들의 특징이 있다. 그들은 ‘선민사상과 특권의식’이 강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여호와께 특별히 택함 받은 민족’이라고 믿었다. 그들이 가진 선민의식의 중요한 근거가 바로 ‘율법’이었다. 하나님이 다른 민족이 아니라, 바로 ‘유대민족에게만’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오직 자기들만이 하나님께 받은 율법이 있어서 그 율법으로 구원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디를 가도 특별하게 행동했다. 지금도 그렇다. 브라질을 가도 그렇고 미국에 가도 그렇고 어디를 가도 그렇다. 유대인들은 회당을 지어놓고 랍비를 통해 율법의 가르침을 받고 살아간다. 랍비들은 브라질이든 미국이든 어디서나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자기들만의 복장을 하고 있다. ‘검은색 긴 옷, 검은색 모자, 긴 수염’을 고집한다. 뭔가 구별되고 거룩해 보이려고 한다.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의 유대인들은 더했다. 그들은 외국인을 ‘이방인’(異邦人)이라고 불렀다. 이방인은 다른 민족을 얕잡아 부르는 표현이다. 철저하게 자기 민족 중심의 사상에서 생긴 말이다. 이방인을 ‘지옥 불의 땔감’ 정도로 여겼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특별하고 위대한 민족, 누구와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민족’임을 과시했다. 이러한 사상을 자녀들의 뇌리에 심어줬다. 마치 의사가 흰 가운을 입듯이 ‘율법’이라는 가운을 입고 ‘특권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그들이 입고 있는 ‘율법이라는 가운’에 세균이 득실거리고 있다. 이것이 로마서 2장의 핵심 중에 하나이다.

     

    롬 2장의 메시지는 크게 2가지이다. 첫째, 하나님 앞에 자랑할 만한 사람은 없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나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롬 2:12에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했다. 여기에 보시면 율법 없이 범죄 한 사람(이방인)은 어떻게 망한다고 했나? ‘율법 없이’ 망한다고 했다. 왜 율법이 없는 데도 망한다는 것일까?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준이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규정’이다. 우리가 생각해볼 것이 있다. 만일 죄에 대한 규정이 없다면, 죄를 지어도 문제가 될 게 없지 않겠나? 예를 들어 ‘교통법규’를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필자의 집에서 교회에 오다 보면 반려동물 놀이터 주변의 사거리에 전에는 ‘비보호 좌회전’이란 표시가 있었다. 그때는 비보호 좌회전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표지판이 사라졌다. 이제는 비보호 좌회전을 하면 불법이다. 규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시속 60km이하 라는 표지판이 없을 때도 그렇다. 그때는 속도를 내도 문제가 안 되었다. 그러나 그 표지판이 걸리고 나면, 시속 60km이상으로 달릴 때 불법이 된다. 새로운 규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원리이다. 율법은 ‘죄냐, 죄가 아니냐’를 가늠하는 기준이며 규정이다. 그래서 율법이 없다면 죄에 대한 기준과 규정이 없기 때문에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율법이 없는 가운데 죄를 범죄 한 사람(이방인)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다. 그들도 죄로 인해 망한다고 하였다. 그들이 어떻게 망한다고 했나? 그들은 ‘율법 없이’ 망한다고 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양심’ 때문이다. 롬 2:15 “이런 이들은(율법이 없는 이방인들)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양심’이 있어서 그 양심이 자신이 죄인임을 알려준다는 것이다.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양심 저 깊은 곳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양심의 소리’를 조금 전에 읽은 롬 2:15에 보면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고 했다. 양심이 말하는 것이 있다.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는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아도 ‘양심’이 문제를 제기한다. 양심이 속에서 ‘죄’라고 말한다. 양심이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라도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양심은 ‘죄를 이길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양심이 죄를 짓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양심은 자신이 ‘연약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것으로 다가 아니다. 두 번째 주시는 메시지가 있다.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롬 2장은 3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중요한 점을 집어주고 있다. 롬 2장의 마지막 구절이 그렇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8,29절) 할례는 남자들이 몸에 행하는 것으로 ‘유대인이라는 표식’이다. 그런데 몸에 행한 육신의 할례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하였다. 육신이 아니라 ‘마음’에 행하는 할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음에 할례를 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유대인의 할례는 사내가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에 생기기의 포피 일부를 베어내었다. 이것을 할례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통해 ‘정결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할례를 통해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언약의 백성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몸에 행하는 ‘할례’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몸에 행하는 할례가 아니라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에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할례를 받을 때, 벌어지는 일이 있다. 양심이 살아난다. 히 9:14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살리고,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보혈이 ‘양심’을 변화시킨다. 예수님의 보혈로 양심에 할례를 받을 때, 선한 양심이 살아난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능력’도 주어지게 된다. 독자 여러분도 마음에 할례를 받으시라!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의 피로 정결함을 얻으시라! 그럴 때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 그리고 양심의 소리에 민감해진다.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혜가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 글쓴날 : [25-10-15 09:32]
    • admin 기자[honamc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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