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연재] 제1부 어머니는 바보야 24회

  • 공저자 윤기
    공저자 윤 기

    전) 목포공생원 원장

    공생복지재단 회장 

    - 1942년 목포 출생

    - 중앙신학교(現 강남대학교) 사회사업학과를 졸

    - 아동복지시설「목포공생원」의 원장

    - 정신지체장애인시설「공생재활원」을 설립

    - 한국사회복지사협회 부회장‧회장(1987年~2001年)을 역임

    - 1989년 일본 최초의 재일동포를 위한 노인복지시설「고향의 집」을 건립

    - 1978년 제22회 소파상등 수상다수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이사장

    - 저서는《김치와 우메보시》, 역서는《괴짜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 《고령사회 이렇게 살아보세》가 있다.



    공저자 윤문지(타우치 후미애)

    공생복지재단 이사장

     

    -1949년 일본 오사카 출생

    - 쿄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

    - 1972년, 한국 목포로 건너와 목포공생원 생활지도원 역임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 이사, 사회복지법인 윤학

    자공생재단 이사,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제3회 여성휴먼다큐멘터리 대상에《양이 한 마리》로 입선

    - 1982년《나도 고아였다》로 일본 크리스천신문 제5회 아카시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


    “어머!”

    한 직원이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이쪽저쪽에서 터져 나왔다.

    직원 한 사람이 일어나 식당 아주머니들을 힐책했다.

    “국이 이게 뭐예요. 모래투성이잖아요!”

    식당 아주머니들은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몰랐다.

    범인 탐색이 시작되었다. 곧 결론이 났다.

    “아까 기가 와서 거들어 주더니만….”

    “또 그 녀석 짓이야.”

    직원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내 눈과 마주쳤다 나는 잽싸게 유달산 쪽으로 튀었다. 얼마를 달렸는지 모른다. 그저 마구 달렸다. 뒤돌아보니 철이 형이 뒤쫓아오고 있었다. 그는 발이 빨랐다. 곧 따라잡힐 듯싶었다. 붙잡히는 날엔 큰 난리가 날 판이었다. 그는 토끼처럼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정상을 눈앞에 두었을 때 뒤를 돌아보니 철이 형이 단념한 듯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철이 형이 큰소리로 외쳤다.

    “용서해 줄 데니까 돌아와. 당장! 나중에 돌아오면 더 혼난다.”

    나는 듣지 않았다. 산꼭대기를 향해 치달렸다. 드디어 꼭대기에 당도했다. 철이 형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아득히 발아래 보이는 것은 수십 가구의 초라한 농가와 불에 타 없어지면 좋을 허름한 공생원 건물과 그 맞은편으로 펼쳐진 바다, 그리고 한가하게 떠도는 배와 섬들, 새파란 가을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일등암이라 불리는 산꼭대기에 올라 그 한가로운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풍경에 싫증이 나자 길게 누워 잠을 즐겼다. 새파란 하늘에 빨려 올라가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원의 일 따윈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어머니와 직원들의 노여움이 걱정스러웠다.

    ‘어머니는 뭐하고 계실까? 직원들의 노여움에 전전긍긍하고 계실까? 다들 잔뜩 벼르고 있을 거야.’

    태양이 중천에 떠오르자 서서히 배고픔이 느껴졌다. 학교에 갈 수 없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그보다도 뭔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아래를 살펴보니 고구마가 눈에 띄었다. 나는 허겁지겁 미끄러져 내려갔다. 줄기 밑동을 어림하여 두 손으로 흙을 파헤치니 큰 고구마가 잡혔다. 정신없이 파 내려가 흙투성이의 고구마를 들어 올려 바지에 쓱쓱 문질러 털었다. 고구마가 반질반질한 몸통을 드러냈다.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덥석 베어 물었다. 가을 해는 짧았다. 태양이 중천에 있을 때는 유달산의 단풍을 음미할 여유도 있어 좋았으나 점차 불안해졌다. 바다 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아버지가 미웠다. 광주에 식량을 구하러 나간 뒤 그대로 소식이 끊긴 아버지. 사람들은 아버지가 살해당했다고 말한다. 어머니도 미웠다. 오늘에야 희미하게 아들의 존재를 깨달았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아들을 찾아오라며 애태우고 계실지도 모른다. 다시는 무관심하지 않겠다고 사과하실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도 어머니를 용서해 드릴까? 대답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해 이야기해 보았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지고 바람은 더욱 세찼다. 불안감과 까닭 모를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나는 산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발을 헛디뎌 5, 6m나 구르기도 하며 간신히 공생원의 뒤편에 당도했을 때 이미 사방은 캄캄했다.

    나는 곧장 실내로 들어갈 수 없었다. 식당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원아들이 내 앞을 통과했다. 달려가 따뜻한 밥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발각되면 야단이 날 것이다. 모두가 잠들어 고요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 등잔이 꺼졌다. 그러나 어머니 방은 불이 훤히 밝혀져 있었다. 나는 살며시 방 안의 동정을 살폈다. 직원들과 내 일로 언쟁을 하는 듯 보였다.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배도 고팠다. 취침 종이 울리기만 고대했다 변소 뒤편을 지나 강당 옆의 초급반(初級班: 초등학교 1학년~3학년생 교실)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주위가 고요해서 발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나는 고무신을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창 너머로 안을 엿보았다. 선생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철이 형도 없었다. 나는 재빨리 초급반 방으로 뛰어들었다.

    “인마, 큰일 났어. 어머니는 울고 계시고 선생님들은 선생님대로 노여움이 대단하셔. 발견되면 대소동이 일어날 거야. 어쩔래? 도망가지 왜 왔어?”

    도망가다니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캄캄한 밤길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무섭다. 허기져 죽을 지경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먹을 게 없었다. 나는 고무신과 담요를 들고 천장으로 숨기로 했다. 친구들이 무등을 태워 도와주었다.

     

    (다음 25회에 계속)

  • 글쓴날 : [25-09-30 14:29]
    • admin 기자[honamc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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