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포에 파송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후손을 만나다, 첫째날 이야기
  • - 미국남장로교 방문에 참여하신 분

    이 사 장 김주헌 목사 부이사장 고삼수장로

    홍보이사 권용식목사 사무총장 최완민장로



    - 방문목적 : 120년전 목포 땅에 오신 선교사와 그 후손들에게 준비한 선물과 감사인사를 전하고 목포기독교 역사박물관에 전시할 자료수집을 위해 출발하였다

    - 일정 : 미국 남 장로교 방문 모두 5개 주에 걸쳐서 25년 9월1일(월요일)- 10일(수요일) 8박 9일

     

    첫날 여정은 12월 31일 저녁 12시 30분 목포 터미널에서 늦은 시간 일행을 전송하기 위해 송태우 상임이사가 도착하고 일행은 손을 잡고 출발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인천행 고속버스로 출발 인천공항에 오전 5시에 도착하였다. 고삼수 장로의 모닝캄 회원덕분에 모두 대한항공 회원 전용 라운지에서 고급스럽고 맛있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한후 시작이 되자 분주한 출국수속이 진행되었다. 우리가 준비한 선물 보따리가 무려 4박스와 개인용 트렁크와 그리고 휴대가방이 있어 짐은 가득했다. 미국사람들의 취향을 고려하며 그들이 좋아할 선물이 무엇일까를 집행부가 고민하고 고민하여 선택한 것은 한국의 특산물인 홍삼과 사군자가 그려진 전통부채 그리고 소금 치약과 김박스를 준비하였다. 모든 100명을 분을 예상하고 준비하니까 20키로그램 박스 4개가 되었다. 선물 경비는 참가자 4명 모두가 합의하여 개개인이 분담하여 준비하였다. 8일 동안 가가호호 방문하여 마음의 정성이 담긴 선물을 당일 선교사 후손들에게 전달하면서 느낀 감동은 아주 미미한 선물이지만 받기만 하던 교회가 이제 나누고 베푸는 교회로 성장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선교사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손자들까지 3대로 이어지는 고향자택과 소속된 교회들을 교회방문하며 연로한 후손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면서 그들에게 베푼 음식 대접은 남다른 의미와 감동이 있었다. 이제까지 받아만 먹던 자리에서 대접하고 섬기는 자리로의 변화는 늘 새롭고 감동을 자아내는 일이다.

     

    이제부터 8일 동안 그 감동의 이야기를 몇 차에 걸쳐서 적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비행기는 대한항공 777 보잉기로 이코노미석이지만 자리도 비교적 넓고 편했다.

    오전 9시 20분에 인천공항을 출발 무려 14시간 비행하였고 그리고 현지 시각 애틀란타에 10시 30분에 도착하지 미리 본역사관 자문위원인 최은수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준비한 렌트카는 7인승 큰 차량이지만 짐을 싣고 나니까 자리가 여유가 없었다.


    첫째날현지시간 9월 1일 – 애틀란타 공항에서 채터누가까지 이동하여 카딩턴 선교사 둘째 아들 고엘스 커딩턴부부를 만나다. 첫날 여정의 시작은 시차적응이 덜된 몽롱한 상태로 3시간이 동하여 카딩턴선교사 둘째 아들 고엘스 커딩턴 부부와 만났다.

    우리일행이 첫날 방문한 미국 채터누가 지역의 높은 고산 지역에 위치한 룩아웃이 있다

    그곳에는 미국의 명문 대학 커버넌트컬리지가 있으며 카팅턴가문의 9형제가 이 대학 출신이다.

    카딩턴선교사 둘째 아들 고엘스 커딩턴의 안내를 받아서 대학캠퍼스 전체를 둘러보았으며

    모두 함께 사진도 찍었다.

     

     

    카딩턴선교사 둘째 아들 고엘스 카딩턴부부와 만나 저녁식사대접 그리고 룩아웃 마운틴에 있는 선교사님 자택을 방문하여 지난 광주생활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친밀한 교재의 시간을 보냈다. 첫째아들 허버트 카딩턴과 둘째 아들 고엘스 카딩턴은 광주 양림동에서 자란 반은 한국인이다. 그들은 아직도 한국에서의 생활을 아주 생생하게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 어둠이 시작되었고 우리 일행은 다음날 일정을 위해 숙소를 향해 길을 나섰다.

     



     

    먼저 여기서는 고엘스 카딩턴의 아버지인 허버트 카딩턴의 목포와 광주 사역을 면밀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허버트 카딩턴(Hebert Augustus Codington Jr., 1920~2003)은 1949년 미국 남장로교 파송 의료선교사로 간호사인 부인 페이지와 목포에 도착하였다. 목포 프렌치병원에서 국내 최초 엑스레이 치료를 시작하였고 그의 사역은 희생과 헌신이었다.

    여성숙 전 광주기독병원장의 말에 의하면 “ 환자의 기도가 막혀 졸도한 결핵환자의 음식물을 감염을 무릅쓰고 입으로 받아냈다”

    목포에서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가지 않아서 부임한지 다음해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전쟁후 광주가 회복되자 다시 광주 기독병원으로 복귀하였다.

     

    1951년 광주기독교병원(당시 제중병원) 5대원장으로 부임하였다. 6·25 전쟁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 결핵 환자들의 치료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광주에서 영양실조와 인구과밀로 인해 급증하는 폐결핵 환자들의 치료가 급선무였는데, 오늘날 광주기독병원의 전신인 제중병원이 10년 만에 다시 본래의 기능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의 업적은 카딩턴이 뿌린 결핵치료의 씨앗은 스티브 린튼과 인요한 박사 형제가 북한 결핵치료 사업으로 이어받아 오늘 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허버트 카딩턴은 1920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코넬대학교 의대를 마치고 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하였다. 카딩턴은 처음에는 의료선교사가 되기 위해 중국을 마음에 두고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변화된 국제정세의 흐름에 따라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중국이 아닌 한국 파송 선교사로 임명을 받게 되자 예일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카딩턴은 본래 독신으로 선교지에 갈 계획이었으나 중국 선교사의 딸로 자신도 예일대학교에서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메리 리틀페이지 랭카스터(Mary Littlepage Lancaster)를 운명적으로 만나 비전을 공유하며 1949년에 결혼하고 곧바로 한국 선교지인 목포에 도착한 것이다.

     

    박용범 호남신학대학교 교수의 “걸인들의 친구 카딩턴, 예수 향기 발하다” 글에 의하면

    당시 전 국민의 80퍼센트 정도가 잠재적으로 결핵균에 감염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결핵 퇴치가 선결 과제였다. 전염력이 강한 결핵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몸을 아끼지 않고 환자를 치료하는 카딩턴의 모습에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이 고 원장(카딩턴의 한국식 이름인 고허번)마냥 되는 거라면 나도 예수 믿을라요”라고 하며 복음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그가 선교지에서 평생 지켜온 몇 가지 원칙들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네가 가지고 있거든 오늘, 지금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라. ‘내일,’ 혹은 ‘다음에’라고 말하지 말라. 그러면 늦는다”.

    두 번째, “구걸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말라. 열 명이 거짓말을 해도 그중에는 진실로 그 돈이 꼭 필요한 사람이 한 명은 있다”.

    세 번째, “이 세상 재물은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쓰면 주님이 채워 주신다”.그가 평생 ‘거지 대장’이라는 별명을 갖고 사역하게 된 것은 이처럼 아무리 사람들이 자신을 속이고 잘못된 방법으로 자신에게 돈과 필요한 것을 요구한다고 해도 언제나 거절하지 않고, 때로는 알고도 속아주면서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곁에는 언제나 걸인들이 함께 있었다. 또 정작 모두 남에게 전부 나누어주고 자신은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 늘 검약한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스스로 걸인처럼 행색을 하고 다녔다. 평소에 아이들을 좋아했던 카딩턴은 자신의 여섯 명의 자녀들과 더불어 거리에서 구걸하며 방황하는 아이들이나 고아, 결핵에 걸려서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집에 데려와서 함께 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고아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사랑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카딩턴 부부를 존경했다. 선교사의 자녀들은 주일학교도 한국인 교회에 출석하면서 한국 아이들과 함께 자랐으며, 부친의 영향을 받아 두 명은 목사가 되었고 한 명은 전문인 선교사로 활동했다.

     

    한국에서의 사역이 어느 정도 정착이 되자 한국보다 더열악한 곳으로 자원하여 떠났다.

    1974년 한국을 떠나 방글라데시로 사역를 변경한 것이다. 그는 한국과 방글라데시에서 사역하는 동안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50년을 함께 했다. 두 자녀를 잃었고, 아내는 병이 들었으며, 자신은 암에 걸렸으나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면서 선교 사역을 마쳤다. 카딩턴은 오랜 세월의 선교 내용을 담은 선교편지 외에는 자신을 위한 어떤 기록도, 재산도, 기념물도, 기념관도, 단체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주고 빈손으로 천국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광주기독병원은 120년이지난 지금 큰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개원120주년기념 및 카딩턴라파기념관 준공예배에 후손 24명을 초청하여 개원 세레모니에

    기쁨을 함께하는 행사다. 2025년 10월25일(토)오후6시 행사가 시작된다.

    카딩턴라파기념관은 200억규모의 건축비로 건축되는 최신병동으로 기존 병동뒤에 새롭게 신축확장하여 개원한다. 광주 기독병원은 병원을 설립하고 헌신한 선교사들의 족적을 후세에 기리기위해 기념관도 세우고 제중원이야기등 여러 문서로 홍보하고 있다.




     

     

    목포에서 처음 선교를 시작한 카딩턴 일가는 방문지로 목포도 빼먹지 않았다.

    10월 22일수요일(곽군용목사시무) 목포양동제일교회 수요일 저녁예배 그리고 10월 23일목요일 오후 7시 (주안교회 모상련목사시무)에서 선교사의 업적을 기리는 세미나가 준비되어있다.

     

    카딩턴의 둘째아들과 첫째아들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7일째 주일날 오후에 첫째아들 허버트 커딩턴(고허비)부부와 자녀들의 만나 선물을 전달하고 식사대접을 하게되었다.




  • 글쓴날 : [25-09-30 11:39]
    • admin 기자[honamc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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