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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기 목사 상리교회 범사회문제대책운동본부 사무총장 |
신앙생활을 하며 구원을 확신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언젠가 교회를 떠나게 된다. 아무리 교회의 프로그램이 좋아도 교회를 떠나게 된다. 영혼에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면 그런 신앙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다. 언젠가는 교회를 떠나게 된다.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복음(Good news)이 무엇일까? 복음은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이라는 뜻이다. 복음은 구원을 주는 좋은 소식이며, 복된 소식이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했다. 여기에 ‘능력’이라는 말이 나온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능력’이란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두나미스’라고 한다. 여기에서 ‘다이너마이트’라는 단어가 나왔다. 광산에서 사용하는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면 바위가 깨지고 산이 흔들린다. 그런데 복음이 그렇다는 거다. 복음이 역사하면, 사람이 변화되어 딴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던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자 어떻게 됐나?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되었다. ‘베드로’도 그랬다. 예수님을 건성으로만 따라다니다가, 복음을 받아들이자 어떻게 되었나? 예수님을 위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사람이 되었다. 복음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다.
대한 조계종에서 승려로 17년을 살다가 개종한 ‘김진규’ 목사의 이야기이다. 이 분은 경북 영양군 ‘일월사’ 주지의 아들이었는데 스님이 되었다. 하루는 시주를 받기 위해 길을 걸어 나온 적이 있었다. 여기저기 다니다가 어느 집에 들어갔더니 청년이 책을 한 권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내가 줄 것은 이것밖에 없으니,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예수님 믿으세요.”하더란다. 마음속으로 “너나 평생 예수 믿고 살거라.”고 중얼거리며 그 집을 나왔다. 청년이 전해준 성경책을 내버릴까 하다가 왠지 호기심이 생기더란다. 절에 돌아와서 성경책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단숨에 읽기를 시작해서 5번이나 성경을 읽었다. 읽고 나니 불경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불교에서는 죄를 지으면 죄를 지은 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속죄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마다 무조건 죄를 사함받을 수 있다. 먼저 속죄의 가르침이 달랐다. 불교에서는 죽은 석가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늘나라에 계신다고 했다. 불교는 모든 속세를 떠나 홀로 득도해야 부처가 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직접 이 세상에 와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이를 믿는 자마다 구원받을 수 있다. 불교는 율법적인 종교로 고행과 수도 생활을 통해 생로병사 108 번뇌를 극복해야 해탈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기독교는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 달랐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어 가는 곳마다 불교의 허위성을 증언하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얼마나 귀한 변화이고 축복인가! 17년간 승려로 살던 사람을 변화시킨 것이 무엇이었나? 복음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17년간의 수도 생활이 아니라 ‘복음’이었다. 그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것이다. 복음에 능력이 있다. 복음의 능력은 오늘도 역사하고 있다. 필자는 어려서 예수 믿는 친구들을 싫어했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대해서 거부감이 많았다. 집안이 불교를 믿는 집안이고, 어머니 쪽이 무속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 필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제 마음속에 복음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복음은 신분을 바꾼다. 죄인의 신분을 의인으로 바꾼다. 사탄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킨다. 복음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서 살아갈 운명을 영원한 천국 백성으로 바꿔준다. 복음에 이러한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복음’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복음이 무엇이기에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 것일까? 왜 복음에 능력이 있는 것일까? 롬 1:17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했다. 여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가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무슨 뜻일까? 성경 원어를 보면 ‘하나님의 의’가 ‘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공의, 또는 하나님의 정의’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중에 하나가 ‘공의’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다. 정의가 무엇인가? 세상에는 ‘다수의 뜻’이 정의이다. 다수의 의견을 따르며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 것을 정의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죄와 선에 대하여 보응’하는 것이다. 행한 대로 보응하는 것이 정의이다. 악한 자는 응징하고,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주는 것이 정의이다. 하나님의 구원도 그렇다. 구원은 ‘선한 사람’이 받을 자격이 있다. 악인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 이점에 있어서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유사하다. 불교와 힌두교에서는 ‘업보’(業報)라는 말로 구원을 설명한다. 업보는 ‘행위의 결과’라는 뜻이다. 선악의 행위에 따라 ‘고락’(苦樂, 괴로움과 즐거움)이 달라진다고 가르친다. 현재의 괴로움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로 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는 이런 것을 ‘인과응보’라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이 가지신 ‘공의’의 속성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악인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분이다.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주신다. 하나님이 가지신 공의에 의하면, 무슨 일이든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남의 것을 빼앗았으면 그대로 갚아야 한다. 이러한 속성이 레 24:20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누가 폭력을 행하여 상처를 주었으면, 폭행한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라는 거다. 그로 인해 눈이 상했으면 눈에 상처를 주고 이가 뽑혔으면 이를 뽑으라는 것이다.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행하라고 했다. 이것을 ‘복수법’이라고 한다. 받은 대로 복수하라는 것이다. 행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범한 죄에 대해서도 그렇다.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을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다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의롭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의롭게 될 만한 능력도 없다. 성경은 인간에 대하여 분명한 진단을 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4:10)
의로운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말씀한다. 또 이렇게 말씀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사람이 아무리 의롭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죄인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 구원의 길은 우리가 만든 길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구원받는 길을 만드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십자가의 복음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이 친히 ‘의’를 이루셨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며,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 능력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복된 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