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연재] 제1부 어머니는 바보야 23회
  • 공저자 윤기
    공저자 윤 기

    전) 목포공생원 원장

    공생복지재단 회장 

    - 1942년 목포 출생

    - 중앙신학교(現 강남대학교) 사회사업학과를 졸

    - 아동복지시설「목포공생원」의 원장

    - 정신지체장애인시설「공생재활원」을 설립

    - 한국사회복지사협회 부회장‧회장(1987年~2001年)을 역임

    - 1989년 일본 최초의 재일동포를 위한 노인복지시설「고향의 집」을 건립

    - 1978년 제22회 소파상등 수상다수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이사장

    - 저서는《김치와 우메보시》, 역서는《괴짜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 《고령사회 이렇게 살아보세》가 있다.



    공저자 윤문지(타우치 후미애)

    공생복지재단 이사장

     

    -1949년 일본 오사카 출생

    - 쿄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

    - 1972년, 한국 목포로 건너와 목포공생원 생활지도원 역임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 이사, 사회복지법인 윤학

    자공생재단 이사,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제3회 여성휴먼다큐멘터리 대상에《양이 한 마리》로 입선

    - 1982년《나도 고아였다》로 일본 크리스천신문 제5회 아카시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




    설탕

     

    나는 서둘러 텅 빈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을지도 몰랐다. 밥이 남아 있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다행이었다. 설거지를 위해 혼자 남아 있던 옥순이가 진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나를 보고 말했다.

    “너 이렇게 늦게까지 어디 갔다 오니?”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야.”

    “거짓말 마. 산에서 놀다 오는 길이지? 옷은 흙투성이고 가방도 없잖아?”

    도무지 믿어주질 않았다.

    옥순이가 저녁밥을 날라다 주었다. 단무지에 보리투성이의 밥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수저를 든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옥순 누나. 소금 있어?”

    “소금은 왜? 단무지가 싱겁니?”

    “아니, 밥에 뿌려 먹으려고”

    “별일도 다 있네. 소금을 뿌려 먹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금 그릇을 가져왔다. 나는 찬밥에 소금을 얹어 먹기 시작했다. 그때 김 보모가 부엌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갓 부임해 온 그녀는 음성이 카랑카랑했다. 소금을 얹어 밥을 먹고 있는 나를 본 김 보모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원장 아들은 과연 다르군. 설탕을 구경하기도 어려운 시대에 매일 밥에 섞어 먹다니….”

    꾹 참아왔던 슬픔과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XX. 똑똑히 봐라 이게 설탕이냐? 이 엉터리 보모야!”

    설탕을 먹는다고 야단맞은 것보다 원장 아들이니까 라는 말에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다.

    “원장 아들이라고 뭐 다른 게 있어? 이런 때만 원장 아들이라니, 제멋대로야.”

    김 보모에 대한 저항보다도 어머니에 대한 불만과 형용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온몸이 떨렸다.

    김 보모의 날카로운 음성이 식당 안을 울렸다.

    “말 다 했니? 원장 아들이 예절도 모르니? 선생한테 대드는 것 좀 보라니까.”

    “너 같은 게 무슨 선생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기야, 그만두지 못해?”

    옥순이가 말렸으나 나의 분노는 쉽사리 누그러들지 않았다.

    “원장 아들, 원장 아들 하지 마.”

    “원장 아들이니까 밥에다 설탕을 섞어 먹는다 그랬다. 그게 뭐 잘못됐니? 설탕이 먹고 싶으면 조용히 먹을 것이지 달려들긴 왜 달려드니?”

    김 보모는 어떻게 해서든지 위엄을 지키려고 애썼다.

    나는 식탁에 있던 소금을 집어서

    “자, 설탕이다.”

    하며 그녀의 얼굴에 냅다 뿌리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식사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슬픔과 분노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 못된 녀석. 아무리 원장 아들이래도 가만 안 둘 테야.”

    볼멘소리로 고함치는 김 보모의 음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모래국

     

    한밤중에 잠입하듯 돌아온 나는 썰렁한 이부자리에 들었다. 추위와 분노로 이가 딱딱 부딪쳤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도저히 김 보모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복수해 줄 것인가 궁리했다.

    ‘난 고아가 아니지 않은가? 저들과 같은 취급받는 것은 질색이다. 어머니는 나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 건가? 자식은 눈이 보이지 않아 이 고생인데도 어머니는 태평이시구나.’

    나의 가슴속은 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찼다. 나는 늘 어머니의 따사로운 눈길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머니는 내게 관심을 쏟을 시간이 없었다. 아니 그럴 시간이 있어도 다른 원아들과 구별 지어 ‘너는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특별히 애정을 보여준 기억이 없다.

    날이 밝았다. 나는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취사장 아주머니들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구호품으로 들어온 미제 통조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역겨웠다. 이 통조림은 통 내 입에 맞지 않았다.

    나는 호주머니에 숨겨 넣어둔 모래를 움켜쥐었다. 아직도 약간 습기가 남아 있었다. 아주머니들을 돕는 체하며 큰 냄비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쥐고 있던 모래를 국 속에 살짝 털어 넣었다. 이미 그릇에 퍼 놓은 직원들의 국에는 공을 들여 공평하게 집어넣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식당에 들어왔다. 직원들도 나타났다. 김 보모의 모습도 보였다. 제발 다른 테이블에 앉지 말아야 할 텐데…. 성공이었다. 그녀는 어머니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요.”

    어머니가 수저를 드셨다. 이윽고 직원들도 일제히 국을 뜨기 시작했다.

    나는 창밖에서 엿보고 있었다.

     

    (다음 24회에 계속)

  • 글쓴날 : [25-09-11 11:48]
    • admin 기자[honamc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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