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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본부장 박정완 장로 중부교회 |
나는 맏사위다. 그래서 장모님께서 사위들 중에서도 늘 나를 가장 먼저 반겨 주셨던 기억이 있다. 따뜻한 미소와 다정한 인사로 “사위 왔냐?” 하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하지만 세월 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느덧 장모님 연세는 아흔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운이 있으셨지만, 세월의 무게는 그분을 점점 약하게 만들었다.
특히 3년 전 장인어른께서 소천하신 이후, 장모님은 눈에 띄게 기력이 쇠하시고 의지할 벽을 잃은 듯 크게 수척해지셨다. 병원을 드나드는 일이 잦아졌고, 링거 치료가 일상이 되었다. 사소한 증상에도 응급실을 찾는 일이 반복되었다.
얼마 전에도 응급실에 다녀온 뒤, 설득 끝에 우리 집에 며칠 머무르게 되셨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며 고집하시던 분이었지만, 결국 우리의 간절한 권유를 받아들이신 것이다. 아내와 나는 약속했다.
“이제는 최선을 다해 모시자.”
대소변 실수조차 우리의 삶 속에서 감당해야 할 몫이라 여기며, 언젠가 우리의 모습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불과 사흘 만에 장모님은 극심한 혼돈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이어가셨다. 결국 형제들과 의논 끝에, 아는 동생 장로가 운영하는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 순간 마음은 무겁고 복잡했다. 혼자 남겨질 장모님의 외로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당해야만 하는 우리의 한계가 교차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친어머니를 101세로 소천하실 때까지 6년간 직접 모신 경험이 있다. 그때 형제들은 재산 문제로 다투며 의무를 외면했다. 그러나 나는 곁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함께 걸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순간은 나에게 크나큰 교훈으로 남았다.
그래서 장모님은 부족하더라도 집에서 끝까지 모시고 싶었다. 하지만 장모님의 귀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병원 생활조차 힘들어하시던 전력이 있어 마음이 더욱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양병원에서 장모님은 점차 안정을 찾아가셨다.
며칠 전, 담당 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장모님께서 보조기를 끌고 걸음 연습을 하고 계십니다.”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흔둘의 나이에 다시 걸음을 배우겠다는 의지라니. 그것은 단순한 재활 훈련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요 소망이었다.
면회 자리에서 장모님은 밝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다리 힘이 좀만 더 생기면 집에 가서 텃밭에서 가지도 따고, 참외도 따서 나눠 먹을 거야.”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단순한 회복의 꿈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준비의 발걸음을 보았다. 장모님의 걸음은 육체적인 훈련이 아니라 영적인 발걸음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은총을 끝까지 누리려는 몸부림이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 위에 서 있다. 그 길에는 고통과 희생이 동반되지만, 그 끝에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이 기다린다. 장모님의 걸음마 연습은 바로 그 진리를 다시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92세의 걸음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근육의 힘이 아니라 믿음의 힘이기 때문이다. 장모님의 발걸음은 소망을 향한 믿음의 행진이었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믿음의 훈련이었다.
나는 오늘도 장모님의 걸음마 연습을 떠올린다. 비록 더디고 힘겨워도 다시 일어서려는 그 발걸음 속에서, 우리 인생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되묻는다. 그리고 결심한다. 언젠가 나 또한 그 길을 걸을 때, 장모님처럼 희망을 향해 힘껏 내디디리라.
92세의 걸음마 연습, 그것은 분명 성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길에 동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