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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자 윤 기
전) 목포공생원 원장
공생복지재단 회장
- 1942년 목포 출생
- 중앙신학교(現 강남대학교) 사회사업학과를 졸
- 아동복지시설「목포공생원」의 원장
- 정신지체장애인시설「공생재활원」을 설립
- 한국사회복지사협회 부회장‧회장(1987年~2001年)을 역임
- 1989년 일본 최초의 재일동포를 위한 노인복지시설「고향의 집」을 건립
- 1978년 제22회 소파상등 수상다수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이사장
- 저서는《김치와 우메보시》, 역서는《괴짜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 《고령사회 이렇게 살아보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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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자 윤문지(타우치 후미애)
공생복지재단 이사장
-1949년 일본 오사카 출생
- 쿄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
- 1972년, 한국 목포로 건너와 목포공생원 생활지도원 역임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 이사, 사회복지법인 윤학
자공생재단 이사,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제3회 여성휴먼다큐멘터리 대상에《양이 한 마리》로 입선
- 1982년《나도 고아였다》로 일본 크리스천신문 제5회 아카시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 |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6학년인 내가 야맹증에 걸린 것이다. 처음엔 이 삼 일 지나면 낫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도 좀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걱정이 돼서 친구들과 함께 어울릴 기분도 나지 않고 밤중에 외출하는 일 따윈 엄두도 못 낼 지경이 되었다.
“기야! 바다에 모치 잡으러 가자!”
석오가 부르러 왔다.
“못 가. 나 눈이 안 보여서….”
“짜아식, 어제까지도 멀쩡해 놓고.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이 아냐. 정말로 눈이 안 보여.”
야속한 마음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석오가 이상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운동장에 있는 저 우물은 보이겠지?”
“안 보여. 강당이 어느 쪽인지, 고하도(高下島)며 바다도 구별 못 하겠어.”
“야, 이거 큰일이구나. 난 유달산 봉우리 맞은편의 고하도까지 훤히 뵈는데.”
석오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조금도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상을 설명해도 처음엔 아무도 믿어주질 않았다. 익숙한 길도 어두워지기만 하면 공포의 대상이었다. 평평한 길에서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곤 했다. 화장실에 가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화장실은 바깥에 있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 내게는 그야말로 공포의 장소였다. 아이들은 즉시 음모를 꾸몄다.
“기가 야맹증이래. 우리 골려주자.”
“어떻게?”
“화장실 입구에다 돌을 놔두는 거야.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분명 넘어질 거 아냐?”
“그거 재밌겠는데.”
나는 보기 좋게 함정에 걸려들었다. 화장실 입구에 쓰러져 있는 나를 보고 “와아” 하고 야유하며 웃는 얼굴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나는 편식을 한데다 입에 맞는 반찬이 없었다. 부득이 밥 위에 소금을 뿌려 먹는 것이 나의 은밀한 습관이 되어버렸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6학년이 되자 중학교 진학에 대비한 과외 수업이 시작되었다. 저녁까지 계속되는 공부에 나는 창밖에 신경이 쓰여 안절부절못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마쳐야 할 텐데. 뭣 때문에 과외 수업이란 게 생겨서 속을 썩이지? 선생님은 내가 야맹증인 것도 모르실 테고…. 학교에서 측정한 시력 검사에서는 양쪽 눈 모두 0.8이었는데 왜 보이지 않는 걸까? 1학년 때 눈병에 걸려서 수술했던 게 원인일까? 대낮에도 보이지 않게 되면 어쩌지?
귀갓길이 걱정돼 과외 수업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우리 마을에서 유달 초등학교에 통학하는 아이는 6학년생 서너 명밖에 없었으며. 우리 반에는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거기다 수업은 우리 반이 맨 마지막으로 끝나곤 했다.
귀가하는 산길을 혼자서 걷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학교 뒤편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도중에 묘지가 있었다. 대낮에도 어두침침하고 으스스한 곳이었다. 그곳을 빠져나오면 절이 나왔다. 쥐죽은 듯 고요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독경 소리에 전신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걸었다. 도깨비나 귀신이 나오면 지팡이로 내려칠 생각이었다. 지팡이는 밤길을 걷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비탈길을 오를 때는 그런대로 수월했으나 문제는 내리막길이었다. 내리막길은 자칫 방심하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비라도 올 때면 흙 위로 삐져나온 돌 때문에 이쪽저쪽으로 넘어졌다.
그날도 비 때문에 나는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지팡이로 길을 더듬어 나아갔다 걷는다기보다 더듬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렀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 옆으로 넘어졌다. 가방과 지팡이가 날아가 버려 어디에 있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땅 위에 주저앉은 채 손을 더듬었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이럴 때 행인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팠다 가방이란 놈은 어디론가 굴러간 모양이었다. 지팡이도 온데간데없었다.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어머니는 내가 이런 지경인 줄 꿈에도 모르실 거다.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미웠다. 모든 것이 싫어졌다. 학교에 다니는 일도 이젠 지긋지긋했다. 다리 앞에서 또 한 차례 울고 말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행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손으로 더듬어 다리를 건넜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면서….
(다음 23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