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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기 목사 상리교회 범사회문제대책운동본부 사무총장 |
폴란드의 ‘피아노 연주가, 작곡가요, 정치가’였던 ‘파데레프스키’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보스턴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10살쯤 되어 보이는 구두닦이 소년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며 ‘구두’를 닦으라고 말했다. 누추한 작업복을 입고 손에는 솔을 들고 있는데 얼굴에 구두약이 묻어있었지만 귀여웠다. 소년에게 말했다. “내 구두는 지금 닦지 않아도 좋은데 네 얼굴은 좀 닦아야겠다. 네가 얼굴을 닦고 오면 이 은전을 주지~”하며 주머니에서 은전을 꺼내 보였다. 그러자 소년이 ‘yes. sir~’하고 즉시 얼굴을 닦고 돌아왔다. ‘파데레프스키’는 웃으면서 소년을 한 번 안아 주고 약속대로 은전을 주었다. 소년은 돈을 받고서 잠시 후 다시 돌려주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이 은전을 드릴 테니 아저씨 머리 좀 깎고 오세요.” 그는 평소에 자기의 긴 머리털을 ‘예술가의 자랑’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사람 보기에는 흉하게 여겨지고 있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파데레프스키’가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런 말을 했다. “남의 허물만 지적했다가 오히려 망신을 당했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보면 직접 두는 사람보다 옆에서 훈수 두는 사람에게 수가 더 잘 보인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결점은 쉽게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결점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에 전해 내려오는 격언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두 개의 자루를 메고 다닌다.”는 것이다. 자루 하나는 앞에 있고, 다른 하나는 뒤에 있다. 앞의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담고 뒤에는 내 허물을 담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앞 자루에 남의 허물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앞쪽으로 쏠리지 않는다는 거다. 왜 그럴까? 앞에 있는 자루에 ‘남의 허물’을 담을 때마다 뒤에는 ‘내 허물’이 함께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현대인들에게는 이 말이 ‘달리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사람들은 몸이 앞으로 쏠려서 쉽게 넘어질 것이다. 왜 그럴까? 뒤에 내 허물을 담는 자루의 밑이 터져있기 때문이다. 남에 대한 비판을 잘 해도 나에 대한 비판은 아예 안 듣거나 쉽게 잊어버린다.
마 5장에서 7장은 예수님이 주신 가르침 중에도 보석처럼 빛나는 교훈이 담겨있다. 그래서 이를 ‘산상보훈’이라고 한다. 산상보훈은 ‘산에서 들려주신 보배로운 가르침’이란 뜻이다. 그런데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이 ‘비판’에 대해 말씀하셨다. 마 7:1-5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비판’이다.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비판’을 주제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그만큼 ‘비판이나 비난’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면 ‘비판, 비난’이 난무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우리 성도들은 ‘십자가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안경에 비유한다면 ‘십자가의 안경’을 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크게 2종류이다. ‘눈이 좋은 사람, 눈이 나쁜 사람’ 눈이 나쁜 사람은 3종류이다. ‘근시인 사람, 원시인 사람, 난시인 사람’ 감사하게도 우리나라는 안경 문화가 발달했다. 다른 나라는 보통 2,3일 걸리는 안경을 우리는 10여 분 정도면 착용할 수 있다. 그런데 안경을 맞출 때, 내 눈에 맞는 안경을 써야 한다. 근시는 근시에 맞는 안경을, 원시는 원시에 맞는 안경을, 난시는 난시에 맞는 안경을 써야 한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같은 안경을 쓰고 살아야 한다. ‘십자가의 안경’이다. 우리에게는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십자가의 시각’이 필요하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로 유명한 ‘C. S. 루이스’가 오늘 이 본문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풍자적인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푸쉬’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런던을 다녀왔다.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고양이에게 친구가 물었다. “푸쉬야, 어디 갔다 오니?” “여왕의 초청을 받아서 런던에 있는 궁궐에 갔었지!” “그래? 그러면 궁궐에서 무엇을 보았니?” “여왕의 의자 밑에 있는 생쥐를 봤지~” “생쥐 말고, 네가 본 것 중에 다른 이야기를 해줘! 여왕이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하고, 매력이 있든?” 그러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생쥐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서 다른 건 못 봤어!” “런던에는 런던탑, 버킹검궁,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그걸 못 봤단 말이야?” 푸쉬는 아무 말을 못했다. 오직 생쥐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날에도 마치 고양이 ‘푸쉬’와 같은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매사에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하며 살아간다. 왜 그럴까? 그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이고, 다른 사람의 ‘어두운 구석’만 보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남의 허물이고, 단점이다 보니.. 입에서 나오는 것이 비판적인 말들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비판을 잘하는 ‘입’이 바뀌기 전에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다.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이다.
‘달라 보인다’는 것이 중요하다. 심리학자들이 하는 말이 있다.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한 반응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그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반응’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반대로 아무리 세상이 그대로라 할지라도 이를 대하는 나의 반응이 달라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바뀌어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성도’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싶다. “성도는 ‘십자가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다.” 교회만 다닌다고 성도가 아니다. 성도의 영혼 속에는 ‘십자가’가 있다. 그의 영혼에 십자가가 있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른다.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다. 그런 사람을 ‘무늬만 성도, 나이롱 신자, 날라리 신자’이라고 부른다!
여러분은 어떤 신자인가? 여러분에게 십자가가 있나?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요, 능력 있는 성도요,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려면, 우리 안에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눈’이 바뀌어야 한다. ‘십자가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성도에게 어떤 특징이 있을까? 비판보다는 ‘격려’를 좋아한다! 십자가의 정신은 격려와 위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후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이었나?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을 만나서 비난이 아니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 20:19,21)하며 그들을 위로하며 격려하셨다.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하면 ‘마라도나와 메시’를 떠올린다. 메시도 그렇지만 살아생전에 마라도나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그런데 마라도나가 브라질 축구영웅, 펠레에 대하여 악담을 하는 것을 봤다. 기자회견 중에 “펠레는 박물관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했다. 필자는 마라도나가 왜 이런 악담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봤더니 펠레가 먼저 시작했다. 펠레가 인터뷰를 할 때 “마라도나는 돈이 필요해서 아르헨티나 감독직을 수락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에 발끈하여 마라도나도 악담을 했던 것이다. 펠레가 마라도나를 비난하지 않았으면, 마라도나도 악담을 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벌어지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남을 판단하며 정죄하는 말을 한다. 이제부터는 비판적인 말을 ‘스톱’하시기를 권면한다. 남편과 아내, 자녀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잘했습니다! 모든 일이 잘되고 있습니다!”하는 격려의 말을 많이 하시기를 권한다. 그럴 때 실수가 변하여 축복이 되고 잘되고 있는 일들은 더 잘되는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이런 자세가 ‘십자가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성도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