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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김광식 목사 |
에베소 교회는 지도력의 문제로 극심한 몸살을 앓았었습니다. 잘못된 지도자,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사도바울의 영적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어지러웠던 에베소교회를 수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이전의 거짓선생들의 실수를 거울로 삼고, 믿음과 착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어 디모데에게 강력하게 권면하는 내용이 2장에 이어집니다.
◉1절에서 바울은 흔들리지 않는 교회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적인 어떤 좋은 프로그램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재정이 많이 있고, 사람이 많이 모여야 발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 교회는 세상의 높은 지식수준으로 성숙해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 진리 말씀과 성령의 능력과 성도들의 기도의 힘으로 세워지고, 성장하고, 성숙하며,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참 많고 중요한 일도 많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를 가르치며, 주님의 이름으로 섬기며 나누고 베푸는 이웃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할 일이 기도이고, 가장 중요한 일도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사역했던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구제하는 일로 문제가 생겼을 때, 사도들은 집사를 세우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6:3~4절)
무슨 말입니까?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어려가지 어려운 문제와 아픔들이 사도들 자신들이 기도 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서 일어난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충분히 교회를 위해 무릎을 꿇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충분한 기도를 먼저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제는 중요합니다. 교회는 구제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는 구제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전도는 전적인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전도가 되겠습니까?
어디 구제와 전도 뿐이겠습니까? 우리 신앙의 모든 요소가 기도가 아니면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신앙과 생활, 교회 공동체 생활에, 윤활윤 기름과 같습니다. 교회가 기도하지 않으면 교회안에 여기 저기서 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해집니다. 성령의 기도로 기름을 쳐야 합니다. 교회가 기도로 충만하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여건과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만 충분이 받쳐지면 다른 것은 그 무엇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문제가 기도가 부족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교회 수습을 위해 파송된 디모데에게 무엇보다 먼저 기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명입니다. 기도가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쇄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를 해야합니까? 본문1절에서“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나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지만,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의 기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도의 목적은‘하나님께 영광입니다’그리고 모든 기도는 순수해야 합니다. 진솔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고백하며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두손들고 항복하는 것이며,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로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 도고는 일반적으로 중보기도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라틴어에서‘중보’메시테스라는 말은‘두 사람 사이의 갈라진 틈 사이에 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중보기도를 말할 때, 그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중보는 변호의 의미가 아니라. 대속의 의미가 더 진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중보자는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우리와 우리를 향한 공의로운 심판권을 가지신 하나님 사이, 그 벌어진 틈새에 서셔서 우리가 받을 모든 고난과 죽음을 대신 받으신 그 모습이 참된 중보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보기도는 희생입니다. 중보기도는 희생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시간이 되면 하고, 시간이 허락하지 않으면 뒤로 미루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때문에 기도는 시간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비용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때로 성령께서 기도하라고 감화 감동하시면, 내 감정, 내 자신의 의지까지도 내려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주님을 닮아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 멘-
그런데 특별히 본문 2절에서 우리가 위하여 기도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대통령과 정치인들과 각종 고위직들과 윗사람들을 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기독교가 권력과 유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지배자나 권력과 유착되었을 때는, 어떻게 부패했는지를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권력과 연계되어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쿠데타를 묵인해주는 예배를 드려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조용히 제단에 엎드려 묵묵히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울이‘임금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했을 때, 그들은 기독교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던 마치 교회의 적이었습니다. 사단의 앞잡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요즈음 한국의 권력자들이나 정치인들이 하는 일들을 보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손끝만큼도 없을 겁니다. 한 나라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이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 사건들 때문에 국정이 홀란하고 온 나라가 아픔과 고통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젠 신물이 나서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성경은 일러줍니다. 그들이 실망감을 안겨줄수록,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수록,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할 제목이‘지도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왜 권력자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 해야 만 하는 것입니까?
2절하반절에“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한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할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그들의 쥐고 있는 권력을 잘못 사용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신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의 잘못 판단과 행위는 결국 나라를 망치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힘없는 국민들의 몫이 되어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떠안게 합니다. 이것이 반드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도가 아니면 지도자들을 변화시키거나 바꿀 수 없습니다. 지도자에 따라 세계가 바로 돌기도 하고, 거꾸로 돌기도하며, 나라가 바로 서거나 기울기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고 역사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높은 지위에 있는 지도자를 위하여 기도함으로, 우리 나라와 국민이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면서 마음컷 하나님을 찬양하며, 지역사회 성시화와 민족 복음화을 위하여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