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연재] 제1부 어머니는 바보야 19회
  • [19회] 원장 아들
  • 공저자 윤기
    공저자 윤 기

    전) 목포공생원 원장

    공생복지재단 회장 

    - 1942년 목포 출생

    - 중앙신학교(現 강남대학교) 사회사업학과를 졸

    - 아동복지시설「목포공생원」의 원장

    - 정신지체장애인시설「공생재활원」을 설립

    - 한국사회복지사협회 부회장‧회장(1987年~2001年)을 역임

    - 1989년 일본 최초의 재일동포를 위한 노인복지시설「고향의 집」을 건립

    - 1978년 제22회 소파상등 수상다수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이사장

    - 저서는《김치와 우메보시》, 역서는《괴짜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 《고령사회 이렇게 살아보세》가 있다.



    공저자 윤문지(타우치 후미애)

    공생복지재단 이사장

     

    -1949년 일본 오사카 출생

    - 쿄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

    - 1972년, 한국 목포로 건너와 목포공생원 생활지도원 역임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 이사, 사회복지법인 윤학

    자공생재단 이사,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제3회 여성휴먼다큐멘터리 대상에《양이 한 마리》로 입선

    - 1982년《나도 고아였다》로 일본 크리스천신문 제5회 아카시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




    칠판에서 뛰는 고기

     

    전쟁은 계속되었다. 빈곤과 혼란의 와중에서도 학교 문을 닫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란을 당한 나는 두 해를 쉬고 3학년에 진급했다.

    전쟁고아가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을 헤아리고 공생원의 식구는 다시 300명으로 불어났다.

    먹고 살길이 막연했으므로 의논 끝에 선생님과 형들은 매일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

    나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자 전처럼 형들을 따라 물고기를 잡으러 갈 수 없어서 여간 불만이 아니었다. 공부는 무엇 때문에 하는 걸까? 학교가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그러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될 테고 매일 바다에 나가 마음껏 물고기를 잡을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형들의 사정도 모른 채 그런 형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그러니 학교엘 가도 재미있을 리 없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칠판의 글씨들은 어망 속에서 팔딱이는 물고기로 둔갑하여 눈앞을 어지럽혔다.

    ‘오늘은 어느 섬에 갔을까? 물고기는 얼만큼이나 잡혔을까?’ 하는 공상만 늘어갔다.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식당에서 보리죽을 먹고 있는데 형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날씨 한번 좋다. 자, 물고기 잡으러 나가야지?”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불현듯 함께 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어떻게 할까? 선생님께 들키는 날엔 벼락이 떨어질 텐데. 에이 그냥 학교에 갈까? 같이 가려면 저 작은 전마선에 숨어들어야 하는데….’

    나는 죽을 핥으며 정신없이 생각했다.

    마침내 포대를 손에 거머쥐고 학교와는 정반대 길인 바다 쪽으로 달렸다.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자루를 배에 던져넣고 배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사방을 둘러봐도 어디 한 군데 숨을 만한 곳이 없었다. 생각다 못해 뱃머리 부분에 놓여 있는 작은 도구 상자 안에 들어가기로 했다. 상자 안은 가마니 한 장이 겨우 깔릴 만한 넓이여서 쪼그리고 앉아 머리 위에 널빤지를 뚜껑 삼아 덮어썼다. 캄캄해졌다. 형들이 뚜껑을 여는 날엔 끝장이었다.

    잠시 후 왁자지껄한 형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더욱 힘주어 뚜껑을 잡고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이렇게 날씨가 좋으니 물고기도 잘 잡히겠는걸.”

    어느 형이 말했다.

    ‘어서 빨리 배가 출발하게 해 주십시오. 아멘.’

    나는 숨을 죽이며 출발을 기다렸다. 30분쯤 지났을까? 윤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발하지. 잊은 물건은 없나? 점심 준비들은 해 왔겠지?”

    드디어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썩하고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상자를 통해 들려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바깥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파도 소리를 세어 거리를 측정할 셈이었다.

    “구백구십칠, 구백구십팔, 구백구십구, 천.”

    ‘이제는 고하도쯤 왔겠구나.’

    고하도는 공생원 바로 맞은편에 있는 아름다운 심이다. 목포시의 방파제 구실을 하는 이 섬을 지나면 전방이 확 트이고 파도도 한결 거칠어진다. 나는 더는 숨어 있기가 갑갑해서 뚜껑을 홱 젖히고 불쑥 튀어 나갔다.

    “어어? 이 자식 또 빠구리(목포 사투리로 수업을 빼먹는다는 뜻) 쳤구나?”

    “기는 아무래도 잘못 태어난 것 같아. 원장 아들이 아니라 어부 아들로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

    “뭘, 앞으로 어부가 되면 되지. 어차피 공부와는 담쌓은 녀석이니까.”

    철이 형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형 말이 정말 옳다고 생각했다. ‘고아원이 아니라 어부의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이 다도해의 푸른 바다를 무대로 아름다운 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돌아볼 수 있잖아? 수평선 저 너머에는 이보다 더 크고 넓은 바다가 있다는데…. 아마 그 바다에서는 굉장한 물고기도 많이 잡힐 거야.’

    그런 공상을 하고 있을 때 윤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선생님은 이북 황해도가 고향으로 6·25 동란 때 월남하여 국군에 입대했다가 제대 후 군에서 사귄 친구를 따라 목포에 정착해 공생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기야, 너의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고 계시는지 아니? 아버지도 안 계신 공생원을 지키느라 이 험한 시대에 고생하고 계시잖니? 일본에 돌아가면 편히 사실 수 있는데도 말이야. 너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 사업을 이어나가야지. 안 그래? 좋아, 오늘 한 번만 눈감아주지. 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저지르면 안 돼, 알았지?”

    십 년 감수했다 호통을 맞을 줄 알았는데 이쯤으로 끝나 다행이다.

    ‘어른들은 순 자기 멋대로야. 툭하면 어머니가 고생하고 계시니 나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 사업을 이어가야 한다고 훈계한다. 도대체 매일 공부해라, 공부해라…. 그나저나 오늘은 물고기가 얼마나 잡힐까?’ 내 머릿속은 이내 물고기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다음 20회에 계속)

  • 글쓴날 : [25-07-15 15:21]
    • admin 기자[honamc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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