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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기 목사 상리교회 범사회문제대책운동본부사무총장 |
독자들은 늑대 소년 ‘모글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정글북’이라는 소설을 아실 것이라 생각된다. 1894년에 출간되어 꾸준히 읽혀지고 있다. 정글북에란 소설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 있다. 정글북의 작가 ‘키플링’이 그 사건에 영감을 받아 소설을 썼다고 한다. 소설이 출간되기 27년 전 그러니까 1867년에 정글에 버려져 늑대들에게 키워졌던 인도의 ‘디나’라는 소년이 7살에 구조되었다. 하지만 인간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평생 생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끝내 인간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늑대처럼 살다가.. 결국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문제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체성’의 문제이다. 그에게 ‘정체성의 혼란’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늑대인지 인간인지’ 알지 못하고 평생을 방황하며 살아갔다.
성경은 신앙에 대해 설명하며 “새것이 되었다”고 말씀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것이 되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정체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는 정체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정체가 달라졌다. 죄의 종이라는 정체에서 ‘하나님의 종’이라고 정체가 달라졌다. ‘하나님의 자녀’로 정체가 달라졌다. 신앙이 분명한 사람은 정체가 분명하다. “내가 하늘에 속한 사람인지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혼란스러운 사람은 아직 신앙이 분명하지 않다는 증거이다. “내가 하나님의 종인지 세상의 종인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지”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신앙이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지만, 마치 늑대소년이 ‘정체성의 혼란’으로 힘들어한 것처럼 방황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하늘에 속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이 같은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사시기를 바란다.
필자에게는 그리스도인의 달라진 정체 중에 특별히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다. ‘청지기’라는 정체이다. “하나님이 나를 청지기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참 좋다. 너무 감사하다. ‘청지기’하는 당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2가지로 나온다. ‘한국어’사전에서 말하는 청지기와 ‘교회용어 사전’에 나오는 청지기의 설명이 다르다. ‘한국어’사전에 나오는 청지기는 ‘관사와 양반집에서 잡무를 맡아보거나 시중을 들던 하인’으로 나와 있다. ‘교회용어’ 사전에서는 ‘주인이 맡긴 것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위탁 관리인’이라고 나와 있다.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는 ‘오이코노미아’(οικονομια)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이 기록된 당시에는 두 종류의 종이 있었다. 하나는 ‘둘로스’(δοῦλος)라는 ‘종’이다. ‘노예’를 말한다. 노예는 아무 자유가 없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둘로스’는 주인의 소유물로 취급되었다. 또 하나는 ‘오이코노미아’(οικονομια)라는 종이다. ‘청지기’를 말한다. 청지기는 ‘둘로스’와 달리 자유가 있었다.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업무에 대하여 ‘관리’하는 일을 했다. ‘청지기’라는 단어가 새번역성경에는 ‘관리인’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미국의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보는 영어성경 NIV에는 ‘administering’이라고 해서 역시 ‘관리인’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종과 청지기를 비교해볼 때 하나님의 종도 영광스러운 직분이다. 우주의 창조자이며 통치자인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관리인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좀 더 영광스러운 일일 것이다. 주인이 아무에게나 재산을 맡기지 않기 때문이다. 청지기로 세움 받는다는 것은 주인에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이 인정하기에 믿고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정체가 좋다. 하나님께 인정하시기에 저를 청지기로 삼아주셨기 때문이다.
필자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청지기로 삼아주셨다. 청지기도 그냥 청지기가 아니다. ‘선한 청지기’로 삼아주셨다. 그러면 선한 청지기는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할 때 선한 청지기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3가지 자세가 필요하다. 첫째,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의식을 분명히 해야 한다. 종종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남의 물건을 빌려다가 오랫동안 쓰고 나면, 그게 내 물건인 줄 착각한다. 그래서 돌려줄 때가 되면,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착각은 ‘귀한 것’일수록 더 심해진다. 그러나 내가 누리는 것들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생명도’ 내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도, 자녀들도’ 내 것이 아니다. ‘건강도, 물질도’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관리인이다. 주인이 맡겨주신 것을 관리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오랜 세월 맡아서 관리하다 보니까 어느새 내 것인 줄 착각한다. 선한 청지기는 ‘관리자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내게 주신 모든 소중한 것들은 일정 때가 오면 주인에게 다 돌려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뜻’가운데 잠시 내게 맡겨졌을 뿐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결산의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그때까지 나에게 맡겨진 것 뿐이다.
둘째, 선한 청지기는 ‘봉사’에 힘을 다한다. 선한 청지기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봉사하기에 힘쓴다.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했다. 은사는 ‘선물’을 말한다. 많은 분들이 ‘은사’를 어렵게 생각한다. “당신의 은사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대답을 주저한다. 고전 12장에 열거된 것만을 은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전 12장에 기록된 은사만이 전부가 아니다. 은사의 범위는 더 넓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재능이 다 은사이다. ‘좋은 목소리’가 은사이다. ‘말’을 잘하는 것도 은사이고 ‘돈’을 잘 버는 것도 은사이다. ‘건강’도 은사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은사이다. 걸을 수 있는 ‘두 다리’를 가진 것도 은사이다. ‘손’을 놀릴 수 있는 것도 은사이다. 내가 가진 것으로 봉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은사인 것이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직 남겨진 것이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은사로 봉사에 힘쓰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선한 청지기이다.
셋째, 선한 청지기는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 선한 청지기는 다른 말로 ‘충성스러운 청지기’라고 할 수 있다.
마 25장에 달란트를 맡은 종의 비유가 나온다. 이때 주인이 2달란트와 5달란트를 받은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23) 하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셨다. 영어 성경에는 ‘good and faithful servant’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여기에 나타난 ‘and’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어로는 ‘카이’(καί)라고 한다. ‘카이’라는 단어는 2가지 뜻을 가진다. ‘그리고, 즉’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마 25:21에 기록된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씀은 “착한 종, 즉 충성된 종아”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충성된 종’이 ‘착한 종’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청지기도 그렇다.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선한’ 청지기인 것이다. 하나님은 충성을 보신다. 충성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변함이 없다. 늘 한결같다. 그런 사람이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학벌을 묻지 않으신다. 우리의 사회적인 지위를 묻지 않으신다. 우리의 능력을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충성’을 보신다. 충성스러운 청지기를 선하다고 평가하신다. 그리고 충성에 대하여 반드시 보답하신다.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독자 여러분이 되시기 소망한다. 그리하여 “너는 나의 선한 청지기이다!”하며 인정받는 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