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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헌 목사 |
첫째,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떤 희생이나 어떠한 대가를 치르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의 나무 아래 달아매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셨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 의미하는 엄청난 복음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역은 이미 끝이 났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니 너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조건을 내건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다. 그러면 구원을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다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죗값을 대신하여 죽으셨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는 대가를 이미 모두 다 치르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치룰 대가는 단 하나도 없다. 이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내용이다.
우리는 늘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지금 내가 이런 꼴인데도, 이러한 실수를 했는데도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실까?’하는 의문을 갖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하는 것에다 어느 정도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스스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우리 자신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 사랑을 하게 되면 거기엔 조건이 없다.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안정성이 있어 보이고, 키가 크면 왠지 존경스럽기도 하고 우러러 보이기도 하고, 마르면 마른 대로 경쾌해 보이듯이 사랑에는 조건을 붙일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신분을 이야기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끌고 가서 우리의 것과 하나님의 사랑과 합하려고 하니까 항상 불안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결혼하는 것과 같다. 남편이 누구냐에 따라 아내의 신분이 정해지고 달라지듯이 우리의 신분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이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꼭 기억해야 되는 우리의 신분이요, 우리의 위치이다. 신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늘 혼동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기반이 때에 따라 흔들린다. 그래서 그의 위치와 그가 누려야 할 것들을 항상 놓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구원의 동업자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구원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 단독의 사역이요, 행위이다.
둘째, 예수님은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하나님의 삶 속에는 모자람(부족함)이라는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모든 것을 지었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빛을 지어 놓고 보시기에 좋았고 육지가 생겨나고 산천초목이 생겨나는 것을 보시고 좋아하셨다. 그리고 해와 달과 공중의 새와 물고기를 보시고 기뻐하셨고 짐승과 사람을 만드시고 심히 좋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자람의 의지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모든 것을 풍성함의 의지로 지으셨다. 그런데 모자람의 의지를 가져온 존재가 있다. 그것은 마귀이다. 더하기(플러스)가 아닌 빼기(마이너스)의 존재인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꾀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해 인본주의로 인생을 살라고 유혹했다. 아담과 하와는 꼬임에 빠져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인본주의적인 주권을 가지고 살기로 결정했다.
하나님을 반역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그때로부터 시작해 그들의 인생은 처참하게 부족함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첫째는 밝은 빛 대신에 어두움이 그들의 삶을 점령하였다.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마음속에 삶의 의미와 가치, 목적을 상실해 버렸다. 둘째는 인본주의적 무질서가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 왔다. 그 후 인간들은 탐욕으로 말미암아 서로 물고 찢고 싸우며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원리로 살면서 미움과 투쟁과 살생과 전쟁이 그치지 않는 마이너스의 삶을 살게 되었다. 셋째는 인간은 윤리적, 도덕적으로 더러워졌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더러워졌다.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풍요로움 대신 가난과 궁핍이 다가왔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는 풍요로움 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가난을 만드신 적이 없다. 넷째는 인간에게 생명 대신에 사망이 다가왔다.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인데 생명의 원천을 버리자 영은 죽어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졌고 육체도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사망이 인생에게 다가왔다.
원수 마귀는 그 자체가 강렬한 빼기(마이너스) 존재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난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마귀는 강렬한 빼기(마이너스)를 가지고 사람들 속에 들어와 좋은 것은 다 빼앗아 버린다. 영혼을 안 되게 하고 범사를 망하게 한다. 건강과 내일의 소망 또한 도둑질해 간다.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궤계(속일 계획)를 끊임없이 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