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배후의 섭리
  • 홍석기 목사
    상리교회
    범사회문제대책운동본부 사무총장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화 가운데 ‘신데렐라’가 있다. 마음 착한 신데렐라가 계모 밑에서 구박을 받으며 힘들게 살아갔다. 어느 날 신데렐라가 궁전의 파티에 초대되었다. 신데렐라는 요정의 도움으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파티에 참석했다. 왕자가 한눈에 반해버렸다. 결국은 왕자가 신데렐라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동화라고 하지만 현실의 많은 사람들이 ‘신데렐라’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백마 탄 왕자가 아니어도 돈이 많은 사람이나, 권세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인생을 역전시켜주는 꿈’을 꾼다. ‘콜레트 다울링’이 쓴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책이 있다.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인생을 역전시킬 누군가를 기대하는 사람의 심리를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한다. 많은 드라마가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한다. 고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사는데 실은 그 사람이 거부의 상속자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기억이 돌아올 듯 말듯 한다. 보는 사람의 애간장을 태운다. 사람에게 있는 이런 심리에 편승해서 시청률이 올라가곤 한다. 시청자들은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자기 속에 숨어있던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도 ‘신데렐라’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에스더’의 이야기이다. 에스더는 실제에 있었던 역사의 인물인데 신데렐라보다 더 극적인 요소가 많다. 에스더는 남에 나라에 포로로 끌려온 처지이다. 집이 가난했고 신분이 낮고 천했다. 그런데 왕의 눈에 들어서 페르시아라는 대국에 ‘왕비’가 됐다. 신분이 갑자기 달라졌다. 저 바닥에서 하늘로 치솟았다. 에스더는 성경에 나오는 역사 속의 ‘신데렐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에스더에게서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같은 현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보다는 “누구든지 에스더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 ‘섭리’(攝理, divine providence)는 다른 말로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 에스더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는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각본을 쓰시고 연출하신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에스더의 드라마는 잔치로 시작된다. 에 1:4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했다. 당시 중동지역의 패권을 잡고 있던 페르시아의 최고 권력자, 아하수에로 왕이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무려 180일(6개월) 동안이나 계속했다.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의 ‘국력, 왕권’을 자랑하기 위해서이다. 앞으로 시작될 그리스 원정에 앞서서, 그는 왕권을 과시하고 신하들의 충성심을 고취하려 하였다. 그래서 잔치를 180일 동안이나 성대하게 베풀었던 것이다.

     

    하지만 에스더서에는 잔치보다 잔치 뒤에 이어진 ‘뒤풀이 잔치’에 대하여 더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6개월 동안의 긴 잔치가 끝나고 7일간 뒤풀이 잔치가 또 벌어졌다. 이 잔치는 180일간의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 수고했던 ‘수산성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잔치에서 문제가 생겼다. 왕이 왕비의 미모를 자랑하기 위해 잔치 자리에 불렀다. 하지만 왕비가 말을 듣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미모나 자랑하는 노리게 취급을 받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러자 왕의 권위를 떨어뜨렸다고 해서 왕이 크게 진노하며 이 일로 왕비가 폐위가 되고 만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에스더가 페르시아의 왕비가 된다. 이것이 에스더 1장과 2장에 기록되었다. 이런 의문이 생기지 않나? “왜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일까? 에스더서 1장, 2장에 이렇게 자세히 설명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드라마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역사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는 에스더의 사촌오빠인 ‘모르드개’가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이 일어난다. 이 일이 크게 번지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멸족을 당하는 위기에 몰리게 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 일로 모든 상황이 역전된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던 대적들이 진멸을 당하게 된다.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결국은 승리의 영광을 누리는 장면으로 끝나게 된다. 그런데 그 중간중간에 위기의 순간이 있다. 하나님께서 각본을 쓰시고 연출하시는 인생 드라마에 ‘위기의 순간’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기는 성도가 누리는 영광과 승리를 위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는 멀리 내다보아야 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멀~리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어느 집사님이 들려준 재미있는 에피소드이다. 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시던 연로하신 집사님이 집에서 기르던 소에게 받혀서 급하게 병원에 가셨다. 갈비뼈가 네 대나 부러졌다. 그러자 병원에 오신 집사님이 수술실에 들어가며 이를 갈았다. “이놈의 소, 집에 가면 당장 잡아먹어야지~” 의사들이 급하게 수술했다. 수술하다가 깜짝 놀랄 일이 발견되었다. 갈비뼈를 수술하려고 배를 열어보니 ‘폐암’이었다. 그래서 갈비뼈가 부러진 것은 뒤로 하고 ‘폐암’ 수술부터 먼저 했다. 천만다행인 것은 폐암이 크게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폐암은 전이가 빨리 되고 예후가 좋지 않은 병이다. 노인들의 경우에는 특히나 무서운 질환인데 다행히도 조기에 발견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큰 복인가? 집사님이 ‘폐암’도 고치고 ‘갈비뼈’도 다 치료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쾌되었다. 확인차 병원에 검사하러 오셨을 때, 집사님을 수술했던 의사들이 묻더란다. “할아버지, 그 소 잡아 잡수셨어요?” 집사님이 대답했다. “아니요, 아들로 삼았어요.” 그 집사님은 이 이야기의 제목을 ‘인생만사 새옹지마’가 아니라 ‘인생만사 새옹지우’라고 지었다. 소에게 받힌 것이 당장에는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멀리 보니 오히려 복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이와 같다.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 오늘 당하는 화도 내일은 복이 될 수 있다. 오늘 화를 당하게 될 때, 이를 내일의 복으로 믿다 보면 그 믿음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막히는 풀리기 시작하고 좋은 일이 일어나고, 좋은 결과가 따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했다. 비록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싸이지 아니한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말고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한다. 거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 존재가 우리 믿음의 자녀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일들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멀~리 내다봐야 한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하나님과 아담이 대화를 나누었다. 아담이 하나님께 여쭈었다. “하나님, 하와는 정말 예뻐요. 왜 그렇게 예쁘게 만드셨나요?” “거기에는 다 뜻이 있단다. 그래야 네가 늘 하와만 바라보지 않겠느냐!”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던 아담이 다시 하나님께 여쭈었다. “그런데 하나님, 하와는 좀 멍청한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멍청하게 만드셨어요?” “아담아! 거기에도 다~ 뜻이 있단다. 그래야 하와가 너 같은 남자를 좋아할 것이 아니냐?” 우스갯소리 같지만 그렇다. 우리 인생에는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있다. 그리고 모든 일은 그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기를 소원한다!

  • 글쓴날 : [25-05-15 15:41]
    • admin 기자[honamc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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