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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자 윤 기
전) 목포공생원 원장
공생복지재단 회장
- 1942년 목포 출생
- 중앙신학교(現 강남대학교) 사회사업학과를 졸
- 아동복지시설「목포공생원」의 원장
- 정신지체장애인시설「공생재활원」을 설립
- 한국사회복지사협회 부회장‧회장(1987年~2001年)을 역임
- 1989년 일본 최초의 재일동포를 위한 노인복지시설「고향의 집」을 건립
- 1978년 제22회 소파상등 수상다수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이사장
- 저서는《김치와 우메보시》, 역서는《괴짜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 《고령사회 이렇게 살아보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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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자 윤문지(타우치 후미애)
공생복지재단 이사장
-1949년 일본 오사카 출생
- 쿄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
- 1972년, 한국 목포로 건너와 목포공생원 생활지도원 역임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 이사, 사회복지법인 윤학
자공생재단 이사,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제3회 여성휴먼다큐멘터리 대상에《양이 한 마리》로 입선
- 1982년《나도 고아였다》로 일본 크리스천신문 제5회 아카시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
이제부터는 완전히 혼자다. 시청 직원도, 이사들도 멀어졌다. 의논 상대도 없다. 어떡하면 좋을지 앞길이 막막했다. 그러나 마음만은 신기할 만큼 평온했다. 어찌 됐거나 한고비는 넘겼기 때문이다. 남편의 체취가 스며 있는 숙사가 남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 숙사야말로 자신들의 집이라고 돌아온 저 많은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어머니는 자신을 타일렀다.
슬픔을 딛고서
이젠 어찌해야 좋을까? 구체적인 방침도, 대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이 물려준 사업을 재기(再起)시킬 수 있을지 어머니는 자신이 없었다. 일본 여성 치즈코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기 힘들었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얼마나 편할까?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이 고통과 굴레에서 달아날 순 없는 걸까?
남편의 사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줄기차게 어머니를 괴롭혔다.
멀리 떠나온 고향 고치(高知)의 하늘이 그리웠다. 어머니는 해안 기슭을 향해 걸었다. 동지나해(東支那海)로 기우는 저녁 해가 아름다웠다. 이 바다 저편에 내 고향 고치가 있다. 내 어머니가 홀로 살고 계시는 땅.
‘연로하신 어머니께 효도 한번 못 해 봤구나.’
회한은 눈물이 되어 어머니의 볼을 적셨다.
“어머니!”
고기잡이에서 돌아오는 길에 재균 형이 어머니를 발견하고 반가운 듯 달려왔다.
“어머니! 보세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도미가 열 마리나 잡혔어요.”
양동이 안에서 손바닥만 한 도미가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재균아, 넌 항상 나를 도와주는구나.’
“어머니 여기서 잠깐 기다리세요. 너덧 마리 더 잡아 올 테니까요. 오늘같이 바람이 잔잔하고 화창한 날엔 도미가 아주 잘 잡히거든요.”
재균 형은 의기양양했다.
“그래? 언제부터 이렇게 솜씨가 늘었지?”
“외로울 적마다 전 바다를 찾았어요. 바다 저편에는 저의 친어머니가 살고 계실 것 같아서요. 바다를 좋아하다 보니 고기잡이를 자연히 익히게 된 거죠.”
어머니는 검게 탄 재균 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매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지내왔건만 마치 오랜만에 보는 얼굴 같았다.
“재균이가 올해 몇 살이지?”
“확실한 나인 몰라요. 작년에 원장 아버지께서 열다섯이라고 하셨으니까…. 하지만 열일곱일지도 몰라요. 어머니도 바다를 좋아하세요?”
“나도 여기서 친정어머니를 생각하고 있던 참이란다.”
재균 형은 또 바다에 들어가 고기잡이에 열중했다. 약속대로 열다섯 마리의 도미가 잡혔다. 도미가 팔딱거리는 양동이를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재균 형은 어깨를 나란히 공생원으로 향했다.
“어머니 이거면 저녁 찬거린 충분하죠?”
저녁 반찬을 조달한 재균 형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이 아이들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구나.’
어머니는 재균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달아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원내(園內) 일이라면 그런대로 끌어나가겠지만, 바깥 일을 보려면 아무래도 한국말을 사용해야 했다. 남편이 없는 지금 모든 책임은 어머니가 떠맡고 있었다. 어머니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일본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들에게서 한국어를 배우기로 했다.
피할 길이 없이
막상 한국말을 배우려 하니 일제 강점기에 국어 사용 금지와 6·25 동란으로 인해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한 아이들은 초보적인 문법도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우선 회화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나 마흔을 넘긴 어머니가 발음 공부를 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 태범이가 어머니의 교수역을 맡았는데 아무리 해도 진전이 없는 것이 발음이었다. 전력을 다해 까다로운 발음을 연습하는 어머니에게 원아들은 응원을 보내는가 하면 마냥 재미있어했다. 그럴수록 어머니와 아이들의 연대감은 더욱더 깊어졌다. 어머니는 열심이었다. 어머니의 한국어 실력은 부쩍부쩍 늘어갔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그 말이 전라도 지방 사투리였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하루 일과로 아이들의 공복을 채우기 위해 시내 유지며 교회를 찾아다녔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닌 데 비하면 얻은 성과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다음 17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