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으로 일본에서 환국(還國)하는 우리 가족의 목적지는 광주(光州)였다. 아버지의 고향은 나주(羅州)인데 일본에서의 30여 년 생활터전이 도쿄(東京)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라남도의 도청 소재지 광주라는 도시를 정하셨던 것이다.
부산은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서 귀향하는 동포들로 북새통이었다. 여덟 사람의 대가족 기차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는 소문에 언제 부산을 떠날지도 미지수였다.
그럼에도 백방으로 알아보던 장형이 임시 열차를 운행한다고 해서 기차표를 구해 왔고, 화물도 광주에서 찾도록 의뢰했다는 것이었다. 기적이었다.
부산을 출발한 열차는 대전에서 호남선 광주로 향하는 열차에 치환되었는데 객차 안은 더욱 입석 승객으로 발 디딜 틈도 없는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부산(釜山)을 비롯한 조국의 질서와 공중 위생은 일본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군국주의 집단 교육으로 다져진 일본인들의 질서 있는 공중 도덕과는 전혀 다른 조국에서 맞닥뜨린 동포들의 막무가내식 무질서와 비위생적인 처신들은 나이 어린 필자의 마음에도 앞으로의 험준한 행로를 짐작하게 했다.
열차 안에서 사흘째 되던 날, 광주가 가까운 임곡(林谷) 역에 정차하고서는 기관 고장이라 하여 낮부터 저녁 무렵까지 객차 안에 갇혀 있는 꼴은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목마름과 배고픔에다가 화장실 출입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최악이었다.아버지께서는 자구책을 내놓으셨다. 장형에게 화물을 찾을 수 있는지, 화물을 찾는다면 여기서 임시 머무르고 있을 숙박업소가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고 오게 하셨다.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된다는 장형의 보고에 따라 우리 가족은 모두 하차하여 역전의 신성여관(新城旅館)에 몸을 풀었다. 환국 역시도 전쟁 못지 않은 고난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다음 날부터 광주에 가셔서 거주할 집과 할 일을 알아보시겠다는 뜻을 내 비치시고 가족은 당분간 이 여관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급변하였다.
여관 주인이 친일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과오로 이곳을 빨리 정리하고 떠나야 할 조급한 처지인데,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던 터에 숙박객인 아버지에게 접근 경제성이 있는 업소이니 인수할 것을 집요하게 제안했고, 이에 장형과 상의한 결과 성사가 되어 뜻하지 않게 연고가 전혀 없는 임곡에서의 정착이 결정되었다.
이 곳에서 어머니의 친정이 4km, 형수의 친정이 6km라는 점도 인수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후일담도 들었다. 여관 상호는 「신성여관」에서 아버지의 출생지를 살려 「나주여관」으로 개칭했으며, 종업원은 그대로 종사하게 했다.
숙박객도 식객도 많았다. 일본을 비롯 만주(중국), 러시아, 동남아 등에 강제로 끌려갔던 귀국 동포들이 주 고객이었다.
그러나 영업의 호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인수한 지 2년을 채 넘기기 전에 숙박객은 감소하고 영업 유지가 어렵게 된 상황에 아버지께서 금광사업(金鑛事業)을 제의받게 된다. 어머니의 먼 친척되는 사람이 도청 공무원과 결탁하여 아버지에게 접근한 것이다.
본래 임곡은 금 매장량이 많은데 채광권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이 전쟁 말기 총독부로부터 인력을 징용에, 채광에 필수불가결한 다이나마이트는 무기에, 라는 명목으로 공급이 잠정 중단 상태였으나 이제 나라가 해방되어 도청으로부터 채광권을 취득하여 재개하면 귀국하게 된 보람을 찾을 수 있다는 사기(詐欺)꾼의 집요한 감언이설에 넘어가 엄청난 피해를 당하여 결국 여관을 매도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아버지는 비장했던 자금으로 가옥과 황룡강과 보(洑)를 낀 삼각주의 드넓은 논밭에다가 농막이 딸린 농장을 매입함으로써 귀국 후 두 번째의 전혀 다른 생활 환경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고국에 전혀 적응하지 못해 도박과 외도에 빠진 장형의 정신 개조를 염두에 둔 아버지의 포석(布石)이었던 듯 싶다. 그러나 그마저도 농사에 전혀 경험이 없어 과하게 드는 비용과 재판 비용 및 장형의 탕진, 그리고 공산당 치하에서의 시련과 아버지의 별세 등으로 이어지는 가운(家運)은 재기의 동력을 잃고 만다.
결국 아버지 생전에 여관은 매도(賣渡), 작은 가옥으로 옮기게 되고, 농장마저 논 950평만 남기고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신묘막측하여, 먹구름에 홍수가 휩쓸고 가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저 구름 너머에는 찬란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음을 훗날에야 알았다.
사실 임곡은 아버지에게는 전혀 생소한 무연고지였다. 지인이라고는 누구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한학자이신 외숙(외삼촌)께서 우리 집에 오시면 이 고을에서 존경받는 어르신 몇 분이 외숙을 뵈려 오셔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친분을 쌓는 우정의 사랑방이 되었다.
그 몇 분 가운데 홍 목사님이라는 분이 간혹 아버지를 방문하셔서 도쿄 이야기를 나누셨다. 아버지와 동연배이신 목사님은 도쿄 아오야마가쿠인대학( 青山学院大学; 미국 선교사가 설립한 사립대학교로 신학부가 현재도 있음)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신 애국자이시며, 일본 유학 시절을 회상하며 대화가 통했는지 오시면 신문도 보시고 바둑도 한 수 두고 가시기도 했다.
필자는 편식이 심하여 건강에 매우 취약한 체질이어서 귀국한 해가 10월인데도 말라리아(Malaria,학질) 감염병에 걸려 매년 더울 때면 말라리아로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는데, 때로는 목사님이 기도를 해 주고 가시기도 했다.
목사님은 성탄전야 교회에서의 축하 잔치에 아버지를 초대하여 따라 갔었고, 부활절에도 강권받아 찐 계란을 받아오기도 했지만 아버지도 필자도 종교의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택한 자를 부르시는 소명(召命,calling)의 <때>는 분명히 있었음을 먼 훗날에야 깨달았다. 휴전이 되자 아버지가 필자를 찾아 울산에 오셔서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하시는 말씀 가운데 부모님과 형수, 그리고 누나가 공산당 치하에서 농장에 숨어 사는 처지에 불을 피우면 연기가 나서 붙잡힐 위험이 있어 익힌 음식을 해 먹을 수가 없는 처지여서 농산물을 생식으로 먹을 수 밖에 없을 때 이웃에서 농사를 짓던 장형의 친구 분이 남의 눈을 피하여 찐 감자나 고구마 등 음식을 종종 놓고 가는 친절에 허기를 채웠다고 하시면서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너의 큰 형이 아직 움직일 수 없으니 네가 꼭 인사를 드려야 한다”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다.
귀가했을 때의 집은 동네 한 가운데 위치한 주택이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장형은 여전히 농막에서 형수의 간병을 받으며 회복에 힘쓰는 처지였다.
아버지와 필자가 열사병을 앓다가 결국 아버지가 별세하시는 순간, 임종을 지키던 필자는 거짓말처럼 열이 내리고 황룡강 건너 농막으로 뛰어가서 장형께 아버지의 운명(殞命)을 알릴 수 있었다.
이렇듯 필자의 치유는 기적적이었다. 아니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채 떠나신 것은 한이다. 장례를 치루고 사흘 후가 일요일이었다. 아버지의 유언이 되어버린 장형의 친구 분께 - 문상 오셨을 때도 우리 가족은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드렸지만 – 필자가 가정으로 인사 차 방문했는데 부재중이었다. 옆집의 말인즉 교회에 가셨다는 것이다. 나선 길에 교회까지 찾아가서 그분을 만나 감사의 인사와 함께 봉투를 드리는데 뿌리치면서 “마침 잘 왔다. 함께 들어가자”고 하면서 필자를 예배당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정말 엉겁결이었고, 강제적인 예배 참석이었다.
그 분이 바로 장판성 집사님(張判成,훗날 장로로 섬기다가 별세)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장 집사님을 통하여 필자의 가정을 구원의 방주에 오르게 하셨으니,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신 하나님은 새 언약 백성 삼으시려고 우상의 나라 일본에서 출애굽시키시고, 조국으로 불러내어 모진 고초를 겪는 가운데 인생의 전환점(turning point)에 서게 하신 것이다.
홍 목사님의 초대로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갔을 때의 실내 구조, 중간에 하얀 커튼이 처져 있어 커튼 왼쪽은 여자들, 오른쪽은 남자들로 나뉘어져 예배하였는데, 그날 앉은 자리는 남녀 유별 그대로였지만 커튼은 말끔히 거두어져 있어 교인의 시선이 필자에게 집중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난감하기 까지 하였고 더군다나 학교 친구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올 때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목사님도 홍 목사님이 아닌 젊은 목사님이었다.
예배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난생 처음 대하는 찬양대의 합창은 필자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천사의 음성 같았다고나 할까. 홍 목사님 때에는 찬양대가 없었다. 성악가가 꿈이었던 필자에게 성령께서는 찬양대의 찬양을 접촉점으로 삼으시고 구원의 길로 이끄셨다고 믿는다.
그 날 젊은 목사님의 강설도 울림이 있었다. 다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논조는 알 수 있었다. 예배 후 많은 분들의 환영의 덕담을 들을 수 있었고, 목사님은 예배당 입구에서 인자한 모습으로 “나 이익관입니다”라고 인사하는데 몹시도 송구스러웠다. 장 집사님은 어머니가 주신 봉투를 교회에 저의 가정의 이름으로 헌상하셨다고 귀뜸해 주셨다. 그리고 “이제는 꼭 교회에 나와야 하네”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2시간 가까운 예배는 초신자인 필자에게는 <곤혹> 그 자체였다.
“나락(奈落)으로 떨어진 인간의 절망은 신(神)의 출발이다”라고 했던가.
필자의 절대 의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이 도저히 실감나지 않는 상황에서 고마움의 인사를 갔다가 새로운 세계를 대하고 오는 귀갓길은 카오스(khaos,혼돈) 그 자체였다.
어머니와 누나는 “왜 그리 늦었느냐?”고 물으셨고, 필자는 교회에서 있었던 일과 느낌을 말씀 드렸다. “교회에 다니고 싶으면 다녀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술 담배도 안 한다고 하니 너에게 딱 맞다.” 어머니의 말씀이셨다. 중학교 5학년까지 다니다가 한국에 와서 언어와 글 때문에 진학이 보류된 둘째 형은 영어 공부에 매달리는 한편, 또래들과 친구가 되더니 뜻밖에 술꾼으로 변하였고, 장형의 외도와 도박은 부모님의 아픔이요 가산의 몰락과 직결된 가문의 수치였기에 “나는 공부 외에는 결코 헛눈 팔지 않겠습니다”라고 부모님께 맹세했던 막내아들 필자의 다짐을 어머니는 기억하시고 교회와 연관지어 말씀하셨던 것이다.
당시 우리 나라 전기 사정이 최악이어서 송전 시간(送電時間)이 일몰 시간부터 저녁 10시까지, 아침 5시부터 7시까지였다. 밤에 3시간 내지 4시간 잠을 자고 석유 호롱불 밑에서 계속 공부했던 필자의 얼굴은 코와 눈 언저리 등 얼굴 전체가 연소되는 석유의 그을음으로 새까맣게 되고 자주 코피 때문에 세수할 때의 시간이 길었다. 그런 때의 필자가 일요일이 닥치면 늘 갈등이 생겼다. 신앙적인 갈등이 아니라 선을 베풀어 주신 장 집사님께 대한 인간적 예의의 문제였다. 아침 10시 반 예배당의 초종 소리가 울리면 하던 공부 멈추고, 체면치레 눈도장 찍으러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다가 저녁 예배, 수요 기도회도 꼬박꼬박 나가면서 교회 분위기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필자의 신앙 생활의 첫걸음은 어떤 극적인 문제나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유언에 따른 “인사치레”가 필자를 통하여 전 가족 구원의 접촉점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건대 우리 가족을 하나님의 새언약 백성을 삼으신 그 크고 넓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국권 회복과 환국(還國)을 계기로 필자를 매개로 우리 가족을 180도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생명의 길을 택하게 하셨던 것이다.
절망의 나락에서 붙들어 올리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