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장


  • 1912년 열린 첫 조선야소교장로회총회
    1912년 열린 첫 조선야소교장로회총회


    한국 교회는 초기 선교사들이 전도하며 교회를 세워 나갈 때, 선교사공의회를 조직하여 선교 협의를 하고 결정하며 사역을 펼쳤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한국인 성도들이 늘어가고 한국인 지도자가 양성되면서 한국인이 참여하는 장로교단의 치리회가 구성된 것은 1907년의 일이다.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명이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으므로 이들이 함께 한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독노회가 구성되었다.

     

    1907년 9월 17일, 선교사와 한국교회를 대표한 장로 등 모두 78명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립노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사회를 본 이는 유진 벨 선교사였다. 벨은 지난해 선교사공의회 의장으로서 한국 독노회의 출범 진행을 맡았다. 사회자 유진 벨 목사는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읽고 “우리는 주 예수의 마지막 증인이다”라는 주제의 설교를 했다. 그리고 게일 목사가 떡을 가지고 축사 분병하였으며, 벨 목사는 포도주 잔을 가지고 축하 분잔하며 성례를 행하였다. 그해 선교사공의회 의장인 마포삼열 선교사가 독노회 조직 취지를 설명하였으며, 게일 선교사가 천거하여 모두가 마포삼열 선교사를 초대 노회장으로 선출하였다.

     

    노회 산하에는 전국을 7개로 나뉘어 대리회를 두었다. 경기, 충청, 평북, 평남, 경상, 호남대리회 등이다 독노회가 조직될 당시 한국교회 상황을 보면, 전국에 교회 수가 785개이며, 세례 교인은 18,061명, 전체 교인 수는 75,968명이었다. 목사는 이번에 한국인으로 처음 목사 안수된 이기풍 등 7명을 포함하여 선교사 목사까지 모두 49명의 목사가 있었고, 장로는 47명이 있었다. 1706년 미국 장로교 최초인 필라델피아 노회가 구성될 때는 7명의 목사로 시작되었는데, 그로부터 거의 200년 지나 미국 교회의 선교 열매로 한국에서 열린 노회는 외형적 규모 면에서 훨씬 컸음을 알 수 있다.

     

    독노회 출범으로부터 부흥과 성장을 가속화한 한국교회는 마침내 총회 설립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1911년 9월 대구남문안 교회에서 열린 5차 독노회에서는 7대리회를 7노회로 승격하고 이들 노회로 총회 조직을 결의했다. 그리고 이듬해 이들 노회 대표들이 모여 마침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구성되었다.

     

    1912년 9월 평양 여자성경학원에서 7개 노회(전라, 경상, 경충, 황해, 함경, 평남, 평북)에서 파송한 대표 221명(목사 96명, 장로 125명)이 모여 총회를 창립하였다. 독노회 5회 회장이었던 레이놀즈 목사가 사회로 진행을 하였고 그가 히브리서 5장을 봉독하고 ‘장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후 임원 선거에 들어가 언더우드 목사를 초대 회장에 선출하였다.

     

    모든 일에 연합정신을 튼실히 하던 선교사들의 의지로 총회장도 돌아가면서 하기로 하였기에 첫 해는 미북장로교 언더우드가, 두 번째 1913년에는 호주 장로교의 엥겔(Engel, Gelson, 왕길지), 그리고 세 번째 1914년에는 미남장로교 순서가 되어 유진 벨이 총회장이 되었다.

     

    3대 총회장을 맡은 유진 벨

     

    유진 벨에겐 선배 레이놀즈와 테이트 목사가 있었으나, 레이놀즈는 성경번역과 신학교 교수 일에 전념하였고, 테이트는 남 앞에 나서거나 모임을 주도하는 리더자나 정치인이기보다 일생을 홀로 조용히 전주와 전라북도 농촌 전도에 주력하고 충성했던 선교사였다. 유진 벨 총회장은 의장으로서 3회 총회의 중요 안건을 이끌고 의결하였다.

     

    배유지 총회장은 각 노회에서 상정된 안건을 치리한 외에, 몇 가지 중요한 사안을 결의하였다. 총회 총대는 다섯 당회를 기준으로 목사 1인, 장로 1인으로 하고, 선교사는 모두 다 총회 총대권을 주기로 하였고, 추수감사절은 매년 11월 셋째 주일 후 4일째 되는 날(목요일)을 감사절로 지키기로 결의하여 그 전통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또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마다 영어 교육을 실시하기로 결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다음 총회 장소를 전주 서문밖교회로 정하고 폐회를 선언하였다(광주제일교회 100년사).

     

    1914년 총회장을 맡은 이후로도 유진 벨은 여러 사역에 너무도 바빴다. 그는 자신을 도울 일군을 계속해서 세워야 할 필요를 느꼈다. 1916년 북문안 교회는 두 사람의 장로를 새로 임직하였다. 당시 북문안 교회는 나날이 성장하며 계속해서 성도들이 늘어갔다. 이런 가운데 김윤수와 최흥종 외 교회를 이끌어 갈 새로운 일군의 보강이 절실하였다.

     

    김윤수 장로는 50대 중반으로서 당시로선 상당히 고령이었으며 그동안 유진 벨과 오웬을 도와 전라남도 일대의 교회와 기독교 사역을 개척하고 일하느라 너무도 바쁘고 지친 형편이었다. 최흥종 장로는 평양신학교 학생으로서 3개월은 광주에 없었고, 나머지 9개월은 광주에 있었지만 스와인하트 선교사가 이끄는 확장주일학교 등 어린이 사역에 더 전념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시베리아 선교사로도 나가고 싶어했기에 북문안 교회는 그들을 대신할 일군을 충원하였다.

     

    북문안 교회는 1916년 남궁혁, 이득주 두 사람을 장로로 장립하였다. 유진 벨 목사는 북문안 교회 당회장으로서 새 일군을 세우고 장립하는 일에까지 중심이 되어 이끌었으며, 이어서 1916년 8월엔 당회장 직도 사임하였다. 그가 벌이는 외부사역이 너무도 많았지만, 특별히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서 사역할 때 중요하게 세웠던 원칙, 곧 자전 자치, 자립의 정신에 따라 이제 한국인 목사가 담임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서다.

     

    그를 대신하여 북문안 교회 2대 담임으로 이기풍 목사가 부임하였다. 유진 벨은 동사목사로서 계속해서 북문안 교회의 소속 일군으로 그가 맡은 외부 지역의 전도 활동과 신학교와 총회 차원의 맡겨진 일에 치중하였다.

     

    1916년 8월 전라노회 6회 회의록 보고에 의하면 당시 유진 벨의 책임하에 있는 광주 지역에는 조직교회 4개처가 있었다. 동복 칠천리, 장성 영신, 광주 북문안, 나주 상촌 교회이다. 유진 벨을 돕는 조사는 6명이었고 남자 매서인 1명이 있었다. 유진 벨은 이들을 통해 37개처의 교회를 돌보고 있었다. 유진 벨이 관리하는 이들 교회에는 영수 28명, 서리집사 345명, 기타 일군이 25명이었다. 세례교인은 모두 439명이며 지난 한 해 동안 세례자는 41명, 유아세례는 62명이었다. 주일학교는 22개처를 운영했고, 주일학생 수는 900여명이었다. 또한 유진 벨 목사는 치리도 엄격히 하여 10명을 출교하고 15명을 책벌하였다.

     

    1917년 9월, 7회 전라노회에서 노라복 선교사는 유진 벨 목사가 돌보는 영광읍교회와 나주읍교회에 새 교우가 많이 나오고 은혜를 많이 받는다고 보고 하였다. 그해 노회에서는 전라노회를 전남과 전북 노회로 분립하기로 하였고, 곧이어 9월 17일 목포양동 교회에서 전남노회가 유서백을 1대 회장으로 창립되었다. 1년 후 열린 1918년 7월 강진 병영교회에서 개최한 2회 전남노회에서는 특별히 한국장로교 사기 지역담당 편집위원을 선출했다. 유진 벨은 프레스톤, 이기풍, 변창연과 함께 4인의 편집위원으로 지명되어 1928년에 편찬된 우리나라 장로교 최초의 교단역사서 발행에 기여하였다.

     

    1895년 선교사로 내한하여 1898년 목포 교회를 시작하고, 1904년 오웬과 더불어 광주 교회를 개척하며 전라남도 교회를 세워나갔던 유진 벨 선교사, 귀한 동역자 오웬이 너무도 일찍 그의 곁을 떠나 또한 아프고 슬퍼하였지만, 그가 없는 광주의 1910년대를 유진 벨 선교사는 더욱 힘있게 사역하였다. 광주와 전남의 세워 나가며, 자신이 길러낸 한국인 사역자들로 교회를 자전 자치 자립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평양까지 다니며 신학교 강의도 열성을 부리고 노회와 총회의 일까지 맡아 수고하고 충성하였으니, 그가 또한 멋지고 훌륭한 하나님의 일군 아니었던가!





  • 글쓴날 : [23-11-06 14:07]
    • admin 기자[honamc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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