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웨슬리의 교회관
웨슬리는 18세기 영국 국교회가 형식적이고 전통에 얽매어 산 신앙(living faith)을 영위하지 못함을 개탄하고 교회를 개혁하고 부흥시키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하였다.
그는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보다 부요할 때 성직자와 교인이 타락하는 것을 간파하였고, 실제로 18세기 영국교회는 타락하였다. 웨슬리는 먼저 개인적인 구원을 강조했는데 구원을 은총으로 죄사함 받는 ‘칭의’와 죄성으로부터 깨끗해지고 거룩해져 사랑으로 충만한‘성화’로 나누었다.
성화는 성령의 은총에 대한 신인협력적인 노력에 의해 주어지며, 날마다 말씀과 은혜로 변화를 받아‘영화’를 목표로 온전히 성장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교회를 제도, 의식, 교권, 건물 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되어 가는 자들의 ‘사랑의 교제’, ‘ 사랑의 공동체’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은 성화이고, 그리스도의 피로 획득한 믿음과 사랑과 경건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초대 교회 역시 서로 말씀을 가르치고 물건을 통용한 성화와 사랑의 공동체였다. 웨슬리는 교회는 교회의 머리된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생각했고, 교인 또한 거룩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교회에서 성도 위에 군림하는 인간 지도자는 있을 수 없다(성경에서 목사와 장로와 감독은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자이고, 교회 실무는 집사가 담당). 웨슬리는 교인 생활에 있어서도 근면 검소하게 살면서 저축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솔선수범하여 기본적인 생활비 외에 모든 수입을 선교와 구제를 위해 사용했고, 죽고 나서 남긴 재산은 동전 몇 푼과 은수저뿐이었다. 그는 가재도구를 팔아 구제했으며, 고아와 병자를 돌보는 학교와 진료소, 가난한 자를 위한 집 등을 설립하였다.
웨슬리는 영국교회가 너무 형식적인데 치우쳐 성도를 돌보고 교제하게 하는데 부족했다고 보고, 교회가 교인들간의 인격적 교제가 이루어지고 영육간의 어려운 점을 서로 살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는데 힘을 쓴 것을 상기하고, 성도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장한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성도의 교제를 위해 모라비아 교도들로부터 배운 소집단 제도를 통하여 신도회(Society), 속회(Class Meeting), 조(Band)를 조직하여 신앙 성장과 친교, 전도와 제자 훈련을 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다. 그는 또한 모라비안으로부터 조직, 경건생활, 전도의 열정과 헌신, 찬송 부르기. 노방 전도, 즉석 기도와 설교, 평신도 설교, 교육 등을 배웠다.
웨슬리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와 관습과 교권체제를 그대로 이어 받은 영국 성공회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되도록 교회의 일치를 위해 분리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웨슬리가 목사 안수를 베풀고 설교자를 임명한 것은 성공회와 분열하게 만들었고, 성공회 감독들도 웨슬리를 비방하면서 점차 분리되었다.
∎ 제4장 “교회 안의 작은 교회”의 역사적 배경
웨슬리는 그가‘작은 교회’를 조직하기 이전에 이미 다양한 기독교 전통뿐만 아니라 시대적 상황이 신학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웨슬리의 신학사상에 영향을 준 역사적인 배경과 이를 통해 형성된 신학과 선교사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I. 역사적 배경
한정된 의미로 말한다면, 근대의 영국 교회사는 유럽 중앙 및 남부와 북부의 신학과 교회가‘종교개혁(Reformation)’운동의 관심 아래 있었던 세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민중들, 그리고 전통적인 세계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문제는 영국 제도(諸島)에서도 생동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를 변혁할 만큼의 국민운동을 일으키지 못하였고 또한 다음 시대가 문제를 제기하도록 압력을 줄만한 힘을 갖지 못하였다. 그리고 흔들리고 있었던 통치자와 고위 성직자들의 신중함과 결단에 의해 때로는 로마 교황권과의 관계를 끊기도 하고, 또한 유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신비주의자 야곱 뵈메(J. Böhme)는 17, 8세기에 제인 리드(J.Leade) 및 윌리엄 로우(W. Law)를 통해 영국 전역에 영향을 주었다. 이시대에 가장 영향이 컸던 리처드 박스터(R. Baxter, 1615-1691)와 존 번연(J. Bunyan, 1628-1688), 조지 폭스(G. Fox, 1624-1691) 가운데 박스터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는 모범으로 ‘경건’한 퓨리타니즘(Puritanism)을 대표로 내세웠다. 번연은 《거룩한 전쟁》(Holy War)과《천로 역정》(Pilgrim’s Progress)으로 하나님과 구원과 평화를 위해 싸우는 인간 영혼의 영원의 주제를 서술했다. ‘퀘이커’(Quakers)파의 창시자 조지 폭스는 순회 전도자였으며 신유의 기적을 행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 경험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였다. 그리고 밀톤(J. Milton, 1608-1674)은 Paradise Lost에서 인간의 비참함과 구원을 향한 사모하는 심정을 표현하였다.
다음으로 국가의 교회에 대한 정책은 분명하지 않았다. 참수형 당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올리버 크롬웰이 죽은 후 2년이 되는 1660년에 자신의 부친이 1642년에 도망했던 런던으로 귀환한 후 국민들의 환호 속에 왕위에 올랐다. 1559년부터 엘리자베스 여왕이 시행해 왔던 영국 국교회의 기본적인 신앙 형식 통일령을 1662년에 새롭게 발효시켰다. 교회에 대한 국가의 주권, 주교 제도, 기도서가 다시 표준적인 기준으로 효력을 가지게 되었고, 안수례도 다시 시행되었다. 이들 목사들은 주교에게서 다시 안수를 받든지 아니면 그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와 같은 일은 퓨리탄의 암흑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