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전남 곳곳에 열심 전도
  • <특집> 유진 벨 선교사



  • 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유진 벨과 스트래퍼가 다시 목포를 찾아와 목포 교회 사역을 재개하며 힘을 내었고, 1903년 9월에는 학교까지 개설하였다. 이 고장의 최초 서양식 근대 교육의 효시를 이뤘다. 아픔과 상처를 딛고 다시 시작하는 목포 선교, 전도와 교회 사역에 이어 이제 교육과 학교 사역도 펼치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하늘 은혜는 더욱 함께 하여 지원부대까지 합류하였다. 10월에 오웬 부부가 안식년에서 복귀했으며, 11월엔 프레스톤 부부가 신참 인력으로 목포를 찾았다.

    1903년 늦가을, 목포 현장에 유진 벨을 비롯하여 스트래퍼, 오웬과 휘팅, 프레스톤과 애니 쉐논 모두 6명의 선교사가 활동하였다. 유진 벨은 동료 선교사와 목포 교회의 조사들을 최대한 동원하여 목포 교회를 보다 튼실히 하고 나아가, 목포 인근은 물론 멀리까지 전도 활동을 펼쳤다.

    호남의 5개 지역에 있는 선교부는 스테이션(Station)으로 불렸고, 각 스테이션의 핵심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인근 농어촌 지역에 전도되고 개척된 지교회 모임체는 지회, 아웃 스테이션(Out-Station)으로 불렸다. 유진 벨과 오웬이 목포 첫 사역하던 시기부터 목포 교회와 함께 이미 인근 농어촌 지역에 지회를 개척하였었는데, 잠시 동안의 공백기를 거쳐 재차 1903년 이후 활성화하며 열심 내어서 1904년 들어 잘 알려진 당시의 아웃 스테이션은 대략 8개 정도가 된다.

    이제 우리는 매 주일 일정한 회중이 모여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는 8개 처의 외지 선교부(Out-Station)를 보고할 수 있게 되었다. 목포 교회는 이들 대부분 지역에 지도자를 파견하는데, 물론 그들은 무보수로 일하고 있다.

    목포 남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배암(Paiam) 마을에서는 12명 내지 15명이 주일 예배에 참석한다. 약 40명이 출석하는 우수영에서는 교인들이 자비로 집 한 채를 구입하여 교회건물로 헌당하였다. 목포 북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하나말에서는 20명이 모여 예배드린다. 그들은 최근에 자신들이 돈을 내어 교회를 건축했다.

    10마일을 더 가서, 장성 영신이라 불리우는 곳에서는 30명이 모인다. 그리고 10마일 북쪽에 있는 배치에서는 25명이 출석하고 있으며, 이들 지역들은 장성군에 속해 있다.

    이들 지역들의 동쪽으로, 광주군에는 잉계 200명을 수용하기에 충분한 크기의 교회가 건축되었는데, 무엇보다도 교인들 자신이 건축비를 부담하였다. 이곳은 목포로부터 55마일 떨어져 있다.

    잉계로부터 약 8마일 떨어진 나주군 바다등에는 15명 내지 20명이 예배에 출석한다. 잉계로부터 3마일 떨어진 곳에 도둠(To-Dum-E)이 있다. 우리에게 한국어 쓰기를 가르쳤던 한 선생이 지난 봄 이곳으로 이사해 왔으며, 가장 괄목할만한 일을 이루었다. 4년 전만 해도 그는 세례조차 받지 않은 교인으로 목포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하게 일어났고, 현재 그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동역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제 이곳에 있는 이전의 이웃들은 복음이 그의 가정에서 이루어놓은 근본적인 변화를 목격하고 있었다. 술취함, 아내구타, 그리고 그밖에 다른 소란행위들이 모두 사라지고, 가정기도, 성경연구, 사랑과 조화로 가득차 가고 있다(더 미셔너리 1904년 6월).

    목포 동쪽의 선교 지회는 두 곳으로 배암 마을과 우수영은 해남 화원 반도에 있다. 배암은 뱀골, 지금의 해남 사동리(巳洞里)이다. 가까운 곳엔 목장 마을이 있다. 오래 전 레이놀즈가 처음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그가 남긴 기록에는 이곳 ‘목장’이란 지명이 소개되어 있다. 조선 시대 왕실에서 관리하던 말 목장이 이곳 해남과 진도 일대에 있어서 붙여진 예명이었다. 목장과 뱀골, 그리고 조선시대 중요한 수군 기지중 하나인 우수영은 레이놀즈 때로부터 중요 방문처였고, 이후 벨과 오웬 등이 목포에 선교 기지를 설치한 후 목포 동쪽 지역의 중요 개척 선교지였다. 선교사들은 목포 교회의 마서규, 정관진 조사 등을 내세워 이 일대 사역을 전개하였다. 우수영 교회를 비롯해서 해남군 화원면 일대에 펼쳐져 있는 목장 교회, 예락 교회, 고당 교회 등은 스트래퍼 보고서에 있듯이 이때 이미 전도되어 시작된 기도처로부터 이제 110년여 넘는 오랜 공동체로 자라 있다.

    목포 북쪽으로 전개된 6개 지회는 영광 하나말, 장성의 배치와 영신, 광주 잉계와 도둠, 나주 바다등이었다. 주로 지원근 조사의 활약이 컸다. 그는 아예 이 지역에 상주하면서 지역 모임을 형성하고 신자들의 교육과 예배를 이끌었다. 이들 모임의 지속성과 연속성은 지역민들의 핍박과 더불어 세월이 흐르면서 다소 불투명한 경우도 있지만, 오늘 현재도 영광읍(대) 교회, 장성 영신 교회, 광주 송정리 교회, 나주 삼도리 교회 등으로 성장하며 지역의 장자 공동체로 복음 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스트래퍼의 1904년 봄 당시 보고에는 6개 아웃 스테이션 이야기만 있지만, 그 이후 다른 선교사의 보고에는 이들 외에 다른 곳에도 여럿 있었다. 복길(무안 청계), 본도(진도 분토), 사굼(장흥 삭금), 삼치문, 이도 등지까지 10여곳 훨씬 넘는 곳에 기도처가 있었다.

    유진 벨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는 이들 10여곳 모임 처를 여름과 겨울은 피하고 봄과 가을에 걸쳐 여러번 방문하였다. 성도들의 신앙과 등록 여부를 따라 이들에게 문답을 펼쳤고, 세례자와 세례 준비반(학습)으로 구분하여 합격시켰다. 예배를 함께 드리며 성례를 열고 수세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903년 목포선교사 갓 부임한 프레스톤 부부와 오웬 유진벨 스트래퍼
    1903년 목포선교사, 갓 부임한 프레스톤 부부와 오웬, 유진벨, 스트래퍼



    전남 선교의 도약, 프레스톤 선교사

    유진 벨이 지역 선교에 박차를 가할 때 목포에 새로 부임한 프레스톤은 상당한 힘이 되었다. 기존의 스트래퍼나 오웬 이상으로 신참 선교사는 선배에게 든든한 활력소가 되었다. 프레스톤(Preston, John Fairman, 변요한 1875~1975)은 미남장로교 계통이 아닌 북부의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이다. 버지니아 유니온 신학교는 나중에 첫 안식년 때에 수학하였다. 아내 애니(Preston, Annie Shanon Wiley, 1879~1983)와 함께 1903년 11월 내한하여 목포에서부터 선교 사역하였다. 1년 후 1904년 12월, 벨과 오웬이 광주 개척하며 이임하였을 때 목포에 남아 선배들의 유업을 이었다가 그도 나중에 광주에 전임하였고, 무엇보다 1913년 전남동부 지역의 순천 스테이션을 열 때는 그가 개척자로 헌신하였다.

    프레스톤 선교사는 목포와 광주에서는 선배들이 일군 터 위에서 선교 수업을 쌓았지만, 순천에서는 그 자신이 주도하며 선교와 기독교를 시작하였고, 전남동부 일대의 기독교를 형성하는 데 헌신하였다. 순천 스테이션을 열기 전에 먼저 미국에 돌아가 여러 지역 교회를 순회하며 헌신자와 함께 상당한 기부금을 조성하였다. 함께 합류한 후배 코잇 선교사, 크레인 선교사 등과 함께 지금의 순천 기독교를 일구었다.

    프레스톤 부부는 모두 7명의 자녀를 가졌는데, 대부분 부모를 따라 선교 2세대 헌신하였다. 미리암(Miriam Wiley)은 순천에서 교육 사역을, 애니(Annie Shannon)는 목포에서 교육 사역을 전개했던 다니엘 커밍의 아내로 함께 헌신하였고, 존(John Fairman Jr.)은 광주에서 의료 선교사로, 그리고 플로렌스(Florence Sutphen)는 순천 매산고에서 미술 교사로 각기 헌신하였다.





  • 글쓴날 : [23-08-08 10:10]
    • 김주안 기자[honamc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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