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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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5월 15일 일요일, 목포에서의 첫 공식 예배를 드리며 목포 교회를 시작한 유진 벨,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그의 선교적 감회가 대단했으리라. 조선 서울에 도착한 이후 지난 3년간의 여러 일들이 떠올려지며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이다.
모든 게 낯설고 거북스럽기만 했던 조선에서의 일상 생활, 괴물 같았던 조선어와의 씨름, 괜찮은 것 같으면서도 불성실하기 그지없었던 여러 조력자들, 그 와중에도 동료 선교사들과의 우정과 격려는 늘 힘이 되었고 즐거움이었다. 선배들이 전주와 군산에 정착해가면서 자신도 지난 해에 의욕을 가지고 나주에 포문을 열었는데, 잘 되지 않아 얼마나 실망했던가. 다행히 목포가 개항이 되어 진로를 바꾸고 작년 연말에 이어 올 봄 다시 목포에 와서 두 달여 준비 끝에 드디어 예배실을 만들고 지역민들과 하나님께 예배를 올렸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다. 감사 감격이 충만했다. 입에서 찬송이 저절로 흥얼거려졌으리라. 빨리 아내에게 전해서 이 기쁨을 같이 하고 싶다. 고국에 있는 부모님과 자신을 파송해 준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그는 이제 나주와 달리 목포에서 성공적으로 씨를 뿌리며 이곳에서 오래도록 사역하게 되었다는 결론과 기쁨 속에 일단 다시 서울 집을 찾았다.
15일 주간에 바로 갔는지, 아니면 한 주간 더 지나 22일 주일예배까지 하고 서울에 갔는지는 정확치 않으나 5월 말에서 6월 초순까지 두 주간 이상 서울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며 다른 선교사들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다시금 재충전하며 그 무렵 열린 경사스런 일에 함께하였다. 남장로교 선교사로는 가장 먼저 조선에 온 린니 데이비스 양이 4년 연하인 후배 해리슨 군과 결혼하는 일이었다. 6월 9일 서울에서 열린 결혼식에 레이놀즈가 주례하였으며, 조선에 온 미남장로교 선교회의 최초 커플 탄생이었다.
동료의 멋진 결혼을 축하하며 유진 벨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목포로 같이 가려고 했었다. 가족을 데리고 가자면, 목포에 의사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수였다. 서울에는 여러 선교사들이 있고 의사도 있어서 응급 상황이 발생해도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데, 목포는 서울에서 교통도 멀고 다른 선교사도 없다. 그런데 미국에서 곧 온다던 의사 선교사는 아직 서울에 도착해 있지 않았고, 그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도와달라고 다른 북장로교 의사에게 부탁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별수 없이 가족과 함께 목포 가는 것을 좀 더 미뤄야 했다. 6월 중순 벨은 다시 혼자 목포로 갔다. 하나님 은혜로 목포 교회를 열었으니 이젠 자신이 그곳에 있으면서 전도하고 목양하는 책임을 다해야 했던 것이다.
삐걱거리는 사택 공사
또한 목포에 일군들에게 맡겨놓은 사택 공사가 잘 되는지 감독도 해야 했다. 벨이 서울에 있는 동안에도 목포 일군들은 당시의 임시 초가집 외에 별도의 예배실 사랑방을 포함한 보다 제대로 된 큰 집을 짓고 있었다. 그들과는 8월 16일까지 새 집을 짓기로 계약을 했던 터였다. 그렇게 6월에 내려와서 초기 신자들과 함께 지내며 사택 공사에도 진력하는데, 의외로 공사 진척이 더뎌졌다. 일군들은 생각만큼 속도 있게 일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암반으로 인해 우물 파는 공사가 거의 진척되지 않았다.
저는 오늘까지는 저희 집을 지붕 아래까지 올릴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공사가 터무니없이 연기되고 있고, 골조 공사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계약이 요구하는 것은 8월 16일이지만, 집이 완성되려면 9월 중순이나 10월이 되어야할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 우편물도 받아보지 못했기에 오웬 의사가 언제 올 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습니다. 집이 완성된 후라도 이곳으로 저희와 함께 살기위해 오는 의사가 없다면, 저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오웬 의사가 9월까지는 이곳에 오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저희는 비로소 우리 집에 정착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저는 지난 2년 동안 매우 많은 시간을 제 아내와 아이로부터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 문제에 관해 매우 지친 상태입니다. 집이 다 지어지면 많은 일을 하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또한 삶의 자리를 고정시킨다는 점에서 큰 기쁨을 발견할 것입니다. 또한 꽃과 나무를 심어 이곳을 마치 고향의 집처럼 정감 있게 만들어 보렵니다. 현재 언덕 위의 우리 땅은 제가 심은 나무를 제외하고는 전혀 관목이 없는 황무지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많은 것을 심어서 잘 자라기 시작하면 경관이 달라질 것입니다. 많은 장미와 또 다른 꽃들, 인동 덩굴, 건포도와 구즈베리 나무, 흙딸기, 양딸기, 그리고 아스파라거스를 심을 것입니다. 그밖에도 35 내지 40 그루의 포도나무를 심을 겁니다. 저는 이 포도나무들로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부터 하나의 정자(관목이나 담쟁이로 에워싸서 그늘지게 하는 휴식 공간)를 만들렵니다(유진 벨, 1898년 7월 3일).
공사를 하는 일군들의 손길은 너무 느려서 애초의 일정보다 훨씬 뒤에나 집이 될 것 같았고, 의사 오웬 선교사는 언제쯤이나 목포로 올런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로티와 결혼하여 신혼을 멀리 선교지 조선에서 함께 보내며 의욕을 불태웠고, 이쁜 아들도 얻게 되었지만, 최근 2년여 동안 지방 출장을 계속 다니느라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그는 집도 속히 완공되고 오웬 의사도 속히 합류하여 어서 빨리 목포에 아내 로티와 아들 헨리를 데려와 함께 살며 목포에서 선교의 열정을 불사르고 싶었다.
사적인 충족은 계속 미뤄지게 되어 아쉬웠지만, 벨은 목포 교회의 공적 사역을 점차 속도를 내었다. 교회를 설립한 지 두 달도 채 안되어 이젠 주일 저녁 예배까지 드리게 되었다.
너무 심하게 비가 내려서인지 아무도 저녁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유진 벨, 1898년 7월 3일).
유진 벨은 5월 15일자 첫 예배 드린 날 쓴 편지도 그렇고 두 달 후인 7월 3일자 편지에서도 예배에 대한 기록은 달랑 한 줄만 남겼다. 켄터키에 있는 동생 애니 벨과 어머니에게 각각 남긴 편지에 장황하게 사사로운 이야기를 쓰면서도, 정작 예배에 관한 기록은 너무 박약해서 참 아쉬운 대목이다. 사정있어 저녁예배를 드리지 못했으면, 낮 예배에 대해서만이라도 소상히 감상을 적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한참 세월이 흘러 자신의 편지를 역사가들이 들여다보고 자신과 그 시대의 일들을 엿보는 일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하였던 그다.
유진 벨의 편지를 읽다보면 또 수요일 삼일밤 기도회가 언제쯤 있었는지도 볼 수 있다. 역시 달랑 한 줄이지만, 그나마 이렇게라도 남겨 놓은 게 어딘가! 고맙기 그지없다.
수요일 밤에는 기도회와 두 개의 세례 준비 교육반을 인도합니다(유진 벨, 1900년 12월 10일).
기록한 날짜는 목포교회가 시작한 지 2년 6개월여 지나서다. 잘 알 수는 없으나, 그 훨씬 이전부터 수요 모임이 시작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목포 교회 설립과 주일 낮 예배 시작은 1898년 5월 15일이고, 저녁 예배 시작한 것은 그보다 두 달이 채 안된 7월 초이며 수요 삼일밤 예배는 1900년 12월, 혹은 그 이전부터다.
목포에서 가족이 함께
사택 공사가 미뤄지고 오웬 의사의 도착도 미뤄지고 북장로교 의사의 도움도 못 얻었지만,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서 더 이상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은 유진 벨에게 너무도 외롭고 불편하며 교회에도 그다지 덕이 안 되었다. 나주에서처럼 외국인 남자 혼자서 오래도록 지내며 사람들을 모아놓고 예배하며 모임을 가지는 게 눈치보이기도 했다. 9월 초순 유진 벨의 아내와 아들이 목포로 함께 합류하였다.
저는 일주일 전에 제물포에 갔습니다. 거기서 아내와 헨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내려 왔습니다. 또한 저희 모든 생활 용품을 가져왔으며, 저희 작은 집에 정착하느라 지난 주간 내내 분주히 지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저희가 우리 집에 정착하게 되어 얼마나 기쁜 지 짐작하실 겁니다.
저희는 이 작은 방에서 매우 안락하게 지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집이 준비될 때까지 매우 잘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적어도 두 달 이상은 걸려야 집을 완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겁니다. 목수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났고, 다른 일군들은 대단히 천천히 일합니다(유진 벨).
그가 가족을 만나러 서울로 가지 않고 제물포로 가게 된 것은 이미 서울 집은 목포로 갈려고 얼마 전에 이미 매각을 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임시로 다시 언더우드 집에서 아내와 아들이 하숙을 하고 있던 무더운 여름, 아들 헨리가 열병이 심하고 이질에 걸려 무척 병 고생을 하였다. 북장로교 의사 에비슨은 서울을 떠나 중국 제푸(Chefoo)로 여행을 가도록 처방하였고 가족은 지난 해 못 갔던 제푸에 여름 휴가를 갔었다. 제푸 시는 중국 산동성 칭타오 근처의 옌타이를 말한다. 당시엔 미 장로교의 중국 선교부 가운데 대표적인 한 곳이어서 조선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이 자주 휴가를 즐기던 곳이기도 했다.
7월 하순에 제푸에 갈 때는 가족 3사람이 같이 갔지만, 유진 벨은 목포에서 이미 교회 사역을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8월 초에 혼자 조선 목포로 복귀했고, 남아있던 아내와 아들은 8월 말에 제물포에 도착하며 멀리 목포 유진 벨에게 전보를 쳤던 것이다. 이 전보를 받자마자 유진 벨은 곧장 제물포로 올라가서 가족과 재회하고 바로 목포로 내려온 것이다. 남편 벨이 혼자 내려가서 수고하여 준비하던 선교지 목포, 아내 로티도 이젠 비로소 함께 한 동료 선교사로서 목포 현지에서 동역 사역을 펼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