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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태동의 발자취 - 이성재 목사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이십 사오 년 전 이야기다. 필자는 중국 선양(沈阳)에 위치한 동관교회(東關敎會)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교회는 19세기 말, 영국 스코틀랜드장로회선교부가 파송한 존 로스(John Ross), 존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두 선교사의 한국 선교 전진기지로 세운 유서 깊은 교회이기 때문이었다.


아편전쟁 후 중국 선교의 봇물이 터져 수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밀려 왔고, 이들도 산동 성에 입성하여 전략을 짜고 있을 때, 그들의 선배였던 윌리엄슨(A. Williamson) 선교사로부터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Robert J. Thomas) 목사가 선박으로 평양으로 향하다가 대동강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도전을 받은 이 두 선교사가 한국 선교의 지평을 열겠다는 굳은 의지로 1874년 만주 뉴쫭(牛莊)에 한국 선교 베이스 캠프(Missionary Base Camp)를 세우게 된 데에서 한국 선교 역사는 시작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국과의 접경 지역인 평안북도 압록강 의주 건너편에 있는 고려문(高麗門)을 찾아가 선교할 한국인 동역자를 구하는 일부터 시작한 것이다. 고려문에는 한국인 3백 여 명이 살고 있었으며, 중국과의 교역을 하는 거상(巨商)들의 출입이 빈번한 터라 선교 동역자를 찾는 일이 급선무였으므로 두 선교사는 각자가 고려문을 방문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로스 선교사는 홍삼장사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을 만나게 되었고, 특히 이응찬은 한국어, 한국의 역사, 관습 등을 가르쳤으며, 로스 선교사는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한편, 서상륜(徐相崙)은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홍삼을 팔기 위해서 뉴쫭까지 갔다가 그 곳에서 심한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맬 때 로스가 이를 발견, 매킨타이어가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시켜 정성껏 치료케 함으로써 완치되었으며, 이에 감동을 받은 서상륜은 같은 해인 1879년 로스에 의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입교한 의주(義州) 청년들이 로스 선교사의 지도 아래 이곳에서 이룬 역사적 과업 가운데 가장 큰 기여는 성경의 순수 한글 번역을 도와 출판한 일이다.


로스 선교사는 한글 성경 번역의 과업을 수행할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는 먼저 한글을 체계적으로 익힐 필요를 느껴, 다섯 사람의 의주 청년들을 만난 후부터 이들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1877년에 한국어 입문서(책명 ; A Corean Primer)를 출판하였고, 이어 한국의 문화와 역사 공부에 힘을 기울여 한국의 고대와 근대 역사서(책명 ; History of Corean, Ancient and Modern)를 출간하였다. 로스 선교사와 다섯 청년들은 한자를 터득할 수 있는 지식층은 극히 제한되어 있고, 일반 대중에게는 전혀 관계없는 글이므로 순수한글로 번역하면 만인이 읽고 파급 효과 클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순한글 성경 번역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882년에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1883년과 1884년에는 <사도행전>, <마가복음>, <마태복음>을, 1885년에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를 간행했고, 1887년에는 <예수셩교전셔>라는 제목으로 신약성경 전권 5천부를 선양의 문광서원에서 출간하는 바, 번역한지 10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 아직 선교사가 국내에 들어오기 전에 외지에서 성경이 출판된 일은 세계 선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백홍준(白鴻俊, 1848-1893)은 최초의 권서(勸書, 성경을 반포하는 직)가 되어 1882년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들고 만주 서간도(西間島)의 한인촌에 가서 전도하여 75명의 신자를 얻는 기적을 체험하였다. 당시 한국 땅에 서양 종교는 불법이었고, 성경의 국내 반입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때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성하가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백홍준이 재시도 했다. 그는 시장에 나가 쓸모없는 책들을 여러 권 산 후 화선지에 붓글씨로 쓴 성경을 한 장씩 조심히 뜯어서 돌돌 말아 긴 끈을 만들어 시장에서 구입한 책들을 묶었다. 그리고는 이 책들을 괴나리봇짐으로 짊어지고 강을 건넜는데, 관리는 책들만 조사하고 통과시켜 주었다. 의주 집에 돌아온 백홍준은 책을 버리고, 책을 묶었던 끈을 풀어 다시 성경을 만들어 반포하며 전도하였다. 1883년의 일이었다. 이렇게 국내로 잠입한 백홍준은 의주, 삭주, 강계 등지에서 전도하여 18여 명의 신자를 얻었고 주일마다 자기 집에서 예배함으로써 조직 교회는 아니었어도 최초의 한국 교회의 첫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되었다.


한국 서울에 온지 1년 만에 처음으로 세례를 베푼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는 그로부터 다시 1년 후인 1887년에 한국에서 최초의 조직 교회를 세우는 뜻깊은 일을 하였다. 언더우드는 서울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서 그 해 9월 27일(화)에 14명(서상륜이 서울에 와서 전도한 의주 사람들)의 교인들을 데리고 2명의 장로를 선출(백홍준, 서상륜) 후에 조직 교회를 창립하였으니 이 교회가 곧 ‘정동교회’이다. 이 교회는 후에 새문안(新門內)으로 장소를 옮겨서 교회 이름을 ‘새문안교회’로 개명하였다. 1889년 백홍준 장로는 언더우드 목사를 초빙하여 압록강에서 33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주선하기도 하였다. 그는 로스 선교사와 연락을 취하며 신앙 지도를 받는 한편, 마팻(Samuel A. Moffett) 등 외국 선교사들의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백홍준 장로의 이와 같은 불법 행위(?)에 적개심을 품은 평안감사 민병석은 그를 체포하여 투옥시켰고, 목에 칼을 쓴 채 온갖 고초를 다 겪었던 그는 옥중에서 생을 마감함으로써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또 한 사람의 서상륜 장로는 1883년 로스번역 성경을 가지고 입국을 시도하다가 적발되어 의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때 의주부 집사이며 교인이었던 김효순(金孝順)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고향인 의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상황이 불리함을 깨닫고 동생 경조와 함께 삼촌이 살고 있는 황해도 장연군 솔내(松內) 마을로 이주, 예배당을 짓고 전도 활동을 하여 한국 교회 최초의 교회 요람지로 발전시켰다.


현재 총신대 양지 캠퍼스에는 솔내교회 예배당이 원형 그대로 세워져 있다. 단, 지붕이 볏짚인데 기와집으로 보존되었을 뿐이다. 서상륜은 이어서 승동교회, 연동교회 개척에 크게 기여하였고, 한 때는 세브란스병원 전도사로 헌신하였다. 말년에는 솔내교회에서 전도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상과 같이 한국 교회 개척기는 외지에서 신앙을 받아들인 선각자들이 순한글 성경 번역을 주도적으로 도와서 성경을 출판하였고, 그 성경을 가지고 사선을 넘어 전도하여 결신자를 내고 개회를 개척하는, 그래서 순전히 한국인에 의해 자생적인 교회가 세워졌다는 위대한 역사야말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은 이 순간에도 일하신다.


한국 교회여~! 다시 초심에서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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