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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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계시며, 그 원리들이 성경(Text)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래서 필자는 성경적 원리를 가지고 상황(Context)을 이해하고, 세상과 대화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오고 오는 역사 선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오고 있는 것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대의명분’으로 삼아 그 땅에 적합한 ‘공공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초기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구한 말 굳게 닫혀있던 쇄국정책의 빗장을 성령께서 어떻게 열었으며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소용돌이치는 민족사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벽을 어떻게 깨웠는지 잠깐 살펴보는 것도 유익하리라고 생각된다.
첫째는 수 천 년 동안 내려오던 한자문화(漢字文化)를 한글로 국문화(國文化) 시켰다는 점이다.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淸)나라의 난징조약(南京條約, 1842년)과 텐진조약(天律條約, 1858년)이라는 불평등조약은 유럽 9개국이 중국에 28곳의 조계지(租界地)를 내놓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기독교 선교지가 되어 한국에까지 지경을 넓혔다는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는 놀랍다. 한국과의 관련하여 축약하자면 영국인 토마스(Robert J. Thomas, 1840-1866) 선교사가 중국을 거쳐 한국 평양으로 들어오려다가 대동강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 스코틀랜드장로회선교부 소속 존 로스(John Loss) 선교사와 의사요 목사인 존 매킨타이어(John Mclntyre) 선교사는 중국이 아닌 한국을 목적지로 정했으나 구한 말 쇄국정책으로 들어오지 못하자 중국 요령성에 선교캠프를 설정하고 활동한 가운데 1876년(고종 13년) 만주국에 홍삼을 팔고 약재, 비단을 국내에 들여와 팔던 홍준을 비롯 이응찬, 김진기 등이 로스 선교사의 전도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역시 홍삼 장사꾼이었던 서상륜은 매킨타이어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성경을 읽고 감동을 받아 주님을 영접하고,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들이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이라 할 것이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1875년 이들이 선교사와 함께 최초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그리고 사도행전을 순수 한글로 번역하여 1882년에 완성하였다는 것과 백홍준이 직접 목판활자를 만들어 이 책들을 쪽복음 형태로 간행하여 중국과 국내에 보급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국 교회가 세종대왕이 반포하였던 한글이 4백 여 년 간 그대로 사장(死藏)되어 버린 환경 속에서 과감히 우리 한글을 발굴하여 성경을 번역했던 첫 단초가 경이스럽게도 오늘날 한자 문화가 한글 국문화로 인하여 우리 민족이 문맹률 거의 제로 상태를 이루는 세계 유일의 문명국가가 되었다는 점과 세계가 주목하는 한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 교육과 의료 사업이 한국인의 정신문화와 건강을 선진화시켰다는 점이다. 1882년 조선조 고종(高宗)은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함으로써 한미 간 외교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듬해인 1883년 민영익(閔泳翊)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 11명이 방미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인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이었다. 의사요 목사인 스크랜턴(Rev. William B. Scranton M.D.), 아펜젤러(Hanry G. Appenzeller), 의사 알렌(Horace N. Allen),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등이 최초의 미국 선교사들이다. 특히 알렌은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궁정주치의로 봉사함으로써 조정의 보호 아래 선교 사역이 적극성을 띄게 되었다. 서울의 세브란스병원을 비롯하여 전국 주요 도시에 병원을 개설하여 새로운 서양 의술로 국민건강증진을 도모하는 한편, 의과대학, 간호학교를 개설하여 새로운 학문적, 과학적 의료인들을 양성 배출, 오늘날 한국의 의료기술이 선진국 대열에 당당하게 서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선교의 시은(施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곳곳마다 예배당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화학당, 배제학당, 정신학당, 경신학당 등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 세운 기독교 사학들은 우리 민족의 지식과 의식(意識)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고, 오늘날 대학 진학 수준 역시 선진국을 뛰어넘은 상황인 것은 자랑스럽다.
셋째는 정치, 문화, 예술의 세계화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수 천 년 동안 군신유의(君臣有義) 사상에 젖어 있던 수직적 도덕문화가 개인, 자유, 민주주의라는 수평문화로 대전환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 역시 기독교 사상의 영향이다. 그러나 아직 현재진행형인 것을 감안할 때, 멀지 않아 자유민주주의 뿌리가 내릴 전망은 밝다. 전제군주국을 표방했던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하는 헌법 제1조를 도출하기까지의 역사는 별도 상고해 볼 것이다. 1893년 언더우드가 편찬한 117곡의 <찬양가>는 한국 최초의 서양 악보를 소개한 책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너무도 낯설었던 5선지 악보는 찬송가의 수준을 넘어 오늘날 세계 음악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125년의 음악사(音樂史)를 비롯하여 각종 예술의 발달은 기독교를 빼고 논할 수가 없다.
지면상 각 분야에 걸쳐 열거할 수 없지만, 기독교 정신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우리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소용돌이치는 민족사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구현하려고 했는가를 알게 된다. 우리 한국 기독교는 하나님의 종교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구한 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부터 개화파(김옥균, 박영효 등)와 같은 길을 걸었으며,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와 함께 전파된 서양 문물과 정신을 수용하여 이를 민족 문화화시킨 혁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저력이며, 기독교의 엄청난 가치가 시너지 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정의, 평등, 박애의 기독교 정신은 바야흐로 현재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도덕적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하겠다. 구한 말 칠흑 같이 어두웠던 조선 반도에 복음의 빛이 비치면서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21세기 세계가 열광하는 K-팝 문화 강국의 태풍으로 변한 데에는 대의명분이라는 공공성이 복음 전파의 근본정신으로 작용했고,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 기여하는 선교강국인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은혜다. 진정 살아가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