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역사를 통하여 현재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삶의 지혜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역사는 뒷걸음치는 법이 없습니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처럼 언제나 앞으로 나아갑니다.” 기독교가 근대 한국사회와 문화에 끼친 영향은 큽니다.
[전호에 연속입니다.] ‘을사늑약’을 무효화하기 위해 감리교회의 엡웟 청년회는 상소운동을 벌였다. 진남포 교회 엡웟 청년회의 총무였던 김구도 이 철폐운동에 참가했다. 을사늑약 후 기독교인인 최재학, 이시영 등은 평양에서 올라와 조약의 철폐를 주장하는 격문을 살포하다가 70여 일 간 경무청에 수감되었다. 또 예수교인 김하원, 이기범, 김홍식, 차병수 등도 ‘이천만 동포에게 경고하는 글’을 뿌리고 운집한 시민들에게 격렬한 연설을 하다가, 일본 현병들과 충돌, 일본군 사령부에 구금되었다. 일제의 침략에 울분을 참지 못하던 기독교인 우국지사 중에서 자결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영효 귀국환영 및 궁내부장관 취임 축연에 참석할 것으로 예상한 이등박문이 나오지 않자 그를 제거하려고 준비했던 정재홍이 목숨을 끊었는가 하면, 고종의 양위소식을 듣고 대한문 앞에서 자결한 예수교인 홍태순 등의 예도 있다.
한말 기독교인의 항일운동은 여러 방면에서 이뤄졌다.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서 항일운동을 들 수 있는데, ‘시장세 반대투쟁’과 ‘납세거부투쟁’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다. 선교사와 그 조사들은 “예수교도들에게는 특권상 폭자의 학대와 압박들을 면하고 문명적인 교의에 기초하여 생명 재산 등에 관한 권리를 얻었기 때문에 전제적 정치의 법령과 인도에 반하는 금제 및 가세에는 복종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미 통감부 지배하의 한국정부에 대한 조세저항까지 정당화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항일운동은 폭력적인 무력행사에서도 나타났다. 정재홍이 이등박문을 암살하려 했던 것이나, 안중근과 뜻을 같이했던 우연준이 기독교도였다는 사실, 스티븐스를 제거한 장인환이 기독신자였다는데서 우선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재명 의사와 그의 동지들이 이완용과 이용구를 처단하려 한 경우를 보면, 이재명 자신이 기독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뜻을 같이했던 행동대원 중에는 이학필이라는 목사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기독신자였다. 이것은 뒷날 나타나고 있는 의열 투쟁의 형태와 비슷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의열 투쟁이 1920년대에 적극화된다는 점에 비춰본다면 한말 기독교인들의 의열 투쟁은 매우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한말 이 같은 기독교인의 의열 투쟁은 일제 강점기에는 강우규, 김상옥, 편강열 같은 기독신자들의 의열 투쟁으로 이어진다고 할 것이다. 한말 이 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한 반침략적인 항일민족운동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일찍부터 애국교육을 시켰던 것이 그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은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그것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와서 일제의 침략적 만행을 폭로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서술했던 매켄지에 의해서 지적된 바가 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전에 많은 수의 한국인이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잔다아크 햄프던 및 조지 워싱턴 같은 자유의 투사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근대사를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고 선동적인 서적인 성경을 보급하고 또 가르쳤다. 성경에 젖어든 한 민족이 학정에 접하게 될 때에는 그 민족이 절멸되던가, 아니면 학정이 그쳐지던가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 한말 항일운동의 큰 두 흐름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인들의 애국계몽운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한말 기독교계의 항일민족운동에서 개별적·비조직적인 의열 투쟁에서는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만, 조직적인 의병투쟁에서는 괄목할 만한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의병의 지휘부에 기독교인이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과 관련, 구연영, 구정서 부자와 우동선 등이 기독교인으로서 의병운동에 가담한 것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기독교는 의병운동에 소극적이었다. 일제하의 항일독립운동에는 3.1운동 같은 거족적인 항일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그 후에 항일민족독립운동이 본격화되는 단계에서는 임시정부운동과 외교운동, 무장투쟁과 국내의 실력양성운동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항일독립운동상의 여러 흐름과 세력에서 기독교 민족운동이 갖는 위치는 어떤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제하의 기독교인이 관여한 민족운동은 3.1운동에서 그 역량을 발휘한 이래, 더러 준비론 혹은 개량주의로 흐르는 부류가 없진 않지만, 임시정부운동과 외교투쟁, 무장투쟁과 무실역행운동과 절제운동·농촌운동·사회운동·독립운동자금 지원 및 기도회운동과 신사참배반대투쟁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민족운동으로서의 신사참배반대투쟁에는 기독교인만이 거의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 기독교가 남긴 민족운동이 당시 한국 기독교계의 주류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과 그들의 민족운동에서 기독교적인 이념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 민족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이 기독교계의 주류도 아니고 그들의 민족운동이 기독교계의 합의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기독교계의 의사표시로 볼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일제하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전체 한국인의 극소수라고 하여 한국에 독립운동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독교인의 민족운동에서 보이는 기독교 이념과의 연관성 문제다. 기독교인의 민족운동에서 일반적인 애국심이나 민족의식과의 경계선을 분명히 하기가 힘들지만 전혀 무시할 수 없다. 가령 3.1운동의 이념과 기독교 신앙의 관련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보며 기도하면서 이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사실 등은 이 점을 어렴풋이 나타내 준다. 또 도산 안창호의 민족주의의 기저에는 기독교적인 이념이 뒷받침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도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기독교인과 개량주의와의 관련성 문제와 기독교 민족운동의 투쟁의 강도문제다.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굴절한 인사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부터 보여준 타계주의적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갖는 화해적 성격이 타협적인 것으로 비친 데서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측면을 인정해야 할 것이고, 타협과 굴절이 기독교인에게만 적용되어야 하느냐고 변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신사참배반대투쟁을 민족운동의 차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면 기독교인의 민족운동을 타협일변도로 치부할 수 없다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다. 해방 후 가장 중요한 민족사적 과제의 하나는 부일협력자를 포함한 일제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고 정의로운 새 질서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일제잔재의 청산을 통한 정의로운 새 질서의 확립보다는 일제로부터 떠안은 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험 있는 관료와 무조건 충성할 수 있는 경찰 등의 권력의 도구가 필요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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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2-02-17 09:49: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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