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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바다 위 섬마다 천사가 찾아오다 – 맹현리 선교사

목포권 기독교 근대역사관
본보는 지역복음화와 교회 일치를 위해 충성되이 섬기며 문서 선교사명을 감당해 오던 차제에 ‘목포권 기독교 근대역사관 건립사업추진위원회’법인 발족으로 교계의 큰 관심사인바 성도님들의 적극적인 기도와 참여로 사업이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위하여 기도하며 위원의 글을 계속해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 -


김양호 목사(목포기독교역사연구소장)


대한민국에는 3,200여 크고 작은 섬이 있다. 목포를 중심으로 한 전라남도 서남해안에 가장 많은 섬들이 몰려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그저 변방이요 경계에 지나지 않았던 섬이 지리적으로나 영토 차원에서 육지와 다를 바 없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섬을 주변으로 한 바다의 무궁한 수산자원과 섬 주민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근대화 영향으로부터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하늘의 은혜는 펼쳐져 기독교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았고 하늘의 은혜가 내려졌다.

미 남장로교 호남 선교부는 목포를 중심으로 한 인근의 수많은 섬 지역에도 복음 사역을 펼치기로 했다. 맥컬리 선교사에게 이 전담 임무가 맡겨졌다. 그는 돛단배 한 척을 전세 내어 1전씩하는 쪽 복음서와 수 천장의 전도지, 그리고 음식을 실은 다음 요리사, 언어 선생, 매서인을 태우고 오늘은 이 섬, 내일은 저 섬을 순회하였다. 목포를 떠나면 보통 2주에서 6주 정도 걸렸다. 맹현리 전도팀은 섬에 있는 주민을 찾아다니며 예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는 복음을 전하였다. 

맥컬리(H. Douglas McCallie, 맹현리, 1881~1945)는 미국 테네시 주에서 태어났다. 1907년 목포에 와 1930년까지 신안, 진도, 완도 등 도서 지역을 순회하며 섬기는 데 충성하였다. 그는 텍사스의 넓은 석유 밭을 지닌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는데, 아버지의 도움으로 당시로선 좋은 장비를 갖춘 자가용 배를 가지고 사역하였다. 

맹현리는 간호사인 아내, 요리사, 조사 등 4~5인이 함께 배를 타고 사역을 전개했다. 1910년 그의 보고서에는 95개 섬에 500여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교회 3곳, 예배처소 25개를 설립했다고 한다. 비금 덕산교회를 필두로 신안 중남부 지역이 모든 장로교회는 죄다 맹현리 선교사가 직,간접으로 세웠다.  

맥컬리의 8살 연상 아내 에밀리는 간호사이기도 했다. 그녀는 전주에서 간호 사역하다 맥칼리와 1910년 결혼, 목포와 도서지방 의료 사역에 함께했다. 의료 기술을 지닌 간호사 아내의 협력과 역할은 대단히 컸다. 별달리 의료혜택을 못 받고 살아간 사람들에게 의술 행위는 천사와 다름없었기에 도서민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의사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병을 고친 이들에게 복음 전도는 크게 도움이 되었고,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효과 있는 접촉점이 되었다. 

섬 순회 전도자 박도삼, 박요한 부자

가거도, 목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며, 우리나라 최서남단에 있다. 해안선 둘레 길이가 22킬로미터에 이르는 아름다운 섬으로,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가히 좋은 섬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 가거도(可居島)다. 수십 년 전, 목포에서도 배를 타고 한참을 가야 닿을 수 있는 이 섬에 박요한 목사가 찾아갔을 때 그곳에 살던 ‘최몽삼’이라는 노인이 반갑게 맞았다. 
“목사님이 박도삼 장로 아들입니까?” 최 노인은 어린 시절 박장로에게서 성경과 초학문답을 배우고 예수를 알게 되었다며, 마치 옛 신앙의 아버지를 만난 듯 기쁨의 눈물을 글썽였다. 

박요한의 아버지 박도삼(1876~1956)은 맹현리 선교사로부터 신앙을 접했으며, 그의 조사 겸 매서인으로 그를 따라 섬 전도에 평생을 충성했던 전도자였다. 박도삼은 해남 화산 출신으로 장사를 하던 자였다. 그는 맹현리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으며, 복음 전도자의 삶을 결단하고 하던 일을 그만 두었다. 집안에서 쫓겨나고 가문의 족보에서 지워지는 고난에도 그는 새로 주인 삼은 예수를 위해 충성하기로 했다. 

박도삼은 매서인이 되어 쪽복음 성경을 들고 배를 타고 다니며 신안 지역 다도해를 돌아다녔다. 흑산도, 태도, 가거도, 비금, 도초 등 신안 섬은 물론 진도, 완도까지 섬이 있는 곳엔 어디든 생명의 복음과 빛을 나눠주러 갔다. 배를 타고 풍랑 일렁이는 바다를 다니느라 위험한 순간들은 일상이었고, 섬사람들 특유의 무속신앙, 무당들과 잦은 마찰을 일으켰으며, 주민들에게 외면당하고 쫓겨나가길 수도 없이 했으나, 복음 전도자의 영예로운 고난과 핍박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1915년 흑산 예리교회를 개척했으며, 1943년 도초중앙교회 장로 임직을 받았다. 박도삼 전도로 도초에서 신자가 된 최명길은 목사가 되어 목포연동교회 담임을 하다, 6.25때 순교했다.  

박도삼 장로의 섬 전도 일생은 아들 박요한에게 이어졌다. 박요한은 어릴 때 비금 덕산교회 출석을 했으며, 목포영흥학교와 서울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총회장을 지내고 정년 하였음에도 노년에 더욱 힘써 전국의 낙도를 돌며 전도자의 삶을 이어갔다. 부전자전을 넘어 아버지를 뛰어넘는 활약을 하였다. 아버지 박도삼은 전남 서남해안을 다녔는데, 아들 박요한 목사는 3면 바다 한반도 전역의 사람 사는 섬엔 안 가본 곳 없이 다니며 전도자로 살았다. 

섬에서 복음 듣고 한국 교회의 일군이 되다

박복영은 암태에서 나고 자라던 중, 맹현리가 찾아와 전도할 때 신자가 되었다. 박복영은 1908년부터 맹현리가 지도하는 목포 달 성경학교를 통해 기독교 지도자로서의 소양을 익혔다. 1916년 고향에 돌아가 농사꾼의 일상을 지내는 한편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았는데, 소작 농민운동, 일제에 대한 항일운동과 함께 기독교 선교와 교육 운동을 한평생 펼쳤다. 박복영은 문준경 전도사와 함께 자은 서부교회를 개척했는데, 이 교회 출신으로 김준곤 목사가 있다.

이처럼 맥칼리 선교사에게서 영향을 받아 예수 믿게 되고, 충성하며 살아간 이들은 참 많다. 완도 약산제일교회 장로 최병호는 맥칼리를 도와 섬 전도에 열심하며 신사참배 반대와 물산장려운동을 펼치기도 했는데, 6.25때 순교하였다. 그의 아들 최 섭은 목포 프렌치병원 의사로 일하며 해방 후 목포 초대 시장을 지내는 한편, 목포 교회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진도 지역 출신으로는 6.25때 순교자 박석현 목사와 신학자 정경옥, 그리고 곽우영 등이 있었다. 맥컬리의 전도와 헌신으로 얼마나 많은 섬 사람들이 하늘 은혜 덧입어 새사람의 일생을 살았으랴.
  
섬을 좋아하고 섬사람들을 좋아했던 맹현리 선교사, 그들 부부의 땀과 청춘으로 섬마을 교회와 신자들이 참으로 복된 생명의 은혜를 입었다. 지금도 진심과 성실함으로 농어산촌 시골 교회를 맡으며 책임 다하는 후예들이 얼마나 많은가! 서울 수도권 화려한 도회지 삶과 사람 많은 도시 교회 부러워하지 않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하며 시골 노인들과 비워가는 마을을 지키는 신실한 사역자들이야말로 진정 하늘에서 해같이 빛나는 인생일 것이다. <둘로스> 


   ▲ 사진 설명 : 1914년 미남장로교 선교사 가족들 (맨 왼쪽 아래 맥컬리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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