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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 이성재 목사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홍사성의 시집≪터널을 지나서≫에 실린 시 한 편이 내 눈에 꽂힌다.


평생 쪽방에서 살던 중국집 배달원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고아였던 그는 도와주던 고아들 명단과
장기기증 서약서를 남겼습니다.


읽고 또 읽을수록 가슴이 먹먹해지는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부끄러워진다. 시인이 노래한 그 중국집 배달원은 고아원에서 성장했으며, 최저 임금도 받을지 말지 모르는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과거 자기와 같은 고아들을 돕던 선하고 자비로운 마음의 소유자다. 그뿐이랴, 이륜차를 타고 쉴 틈 없이 배달하는 그는 항상 교통사고의 위험을 감지했었는지 장기기증서를 남기고 떠났다는 그의 숭고하고 이타적인 박애 정신은 내 심장을 아리게 한다.


그가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 아닌지는 지금 필자에게는 무의미하다. 배달원, 그는 사랑과 불행을 함께 겪어낼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달콤하고 편안한 것만 원하는 나야말로 진실을 보지 못하는 한갓 껍데기 종교인이 아니었던가. 사랑함으로 가난을 가난하다 하지 않고, 고통을 고통이다 느끼지 않고, 오히려 환경과 처지를 딛고 일어나 위대한 영혼을 가진 그가 작은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고통을 거름으로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능동적 의미의 고통은 사랑으로 감당한다는 의미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고통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감당하는 고통이다. 상처투성이 흙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웠듯이 중국집 배달원 그는 사랑으로 고통을 승화시킨 위대한 영웅이다.


현대인은 치열한 경쟁 시대에 살고 있다. 완전히‘오징어 게임’이다. 남이 죽어야 내가 사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부모가 누구인지, 엄마의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생명력이 있는지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성장한 가운데 원망과 의로움은 사치스러웠는지 그는 세상에 밀려오는 유혹과 위협과 공포와 절망과 자포자기의 파도를 넘어 자아실현의 정신으로 극복하였으리라. 또 나아가 남이 미쳐보지 못한 자기 자신보다 어려운 이웃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 기꺼이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공유했었으리라.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나의 내면에 은혜로서 맛을 내기를 원하신다.


우리 말 표현에 맛을 나타낼 때 ‘맛깔스럽다’, ‘깊은 맛이 있다’, ‘간이 맞다, 안 맞다’ 등의 형용사가 있다. 성경 갈라디아서에는 성령의 열매가 나온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이다(갈 5:22~23). 여기 ‘열매’는 단수로서 하나의 열매이며, 아홉 가지는 그 열매의 다양한 맛이다. 이 맛을 성경적 의미로 표현하면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깊은 맛이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의 인격 속에서 사랑의 맛, 거룩한 기쁨의 맛, 평화의 맛, 인내의 맛, 자비의 맛, 적극적인 선행의 맛, 충성의 맛, 절제의 깊은 맛을 내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 바로 ‘교회’(Church)이다. 그래서 ‘교회’는 복수형이다. 그래서 우리가‘교회’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빌립보 교회에게 당부하신 말씀에서 교회와 성령의 열매 간의 상관 관계를 읽을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1:27)”고 간절히 호소한다. 여기서“생활하라”,“살라”라는 말이 번역하기 힘든 것은 원래의 뜻이“복음에 합당하게 섬겨나가라”,“복음에 합당한 시민 생활을 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치 빌립보 지방이 이방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이방인에게 로마의 문화와 로마 시민의 긍지를 보여 주듯이, 교회는 썩어져 가는 세상에 둘러싸여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로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라는 의미요, 기독교 윤리이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로마의 찬란한 문화를 보여 주기 위한 맛보기로 존재한 빌립보 지방과 비교하여 빌립보 교회가 하늘 나라의 깊은 맛을 보여 주는 공동체임을 말하고자 하신 것이다.


 복음 전도자 존 스미스(John Smith)가 호주 멜버른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기독교 세미나를 인도했을 때의 이야기다. 세미나를 시작하기에 앞서 사회자가 학생들에게 광고를 했다.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종이에 써서 제출하면 1부 강의가 끝난 다음, 그 질문에 답을 해 주겠다는 알림이었다. 강의가 끝난 다음에 학생들이 제출한 종이에는 다양한 질문들이 적혀 있었다.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했는데, 사회자가 이런 질문 내용을 읽었다.


“제가 성폭행을 당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요?”그 질문은 신학적인 질문이지만 그 여학생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이기도 했다. 그 질문을 듣고 존 스미스는 대답 대신 눈물을 흘렸다. 커다란 눈물방울이 스미스의 뺨을 타고 내려와 수염을 적셨고, 얼마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 전도자가 강단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안, 모든 학생들은 죽은 듯이 조용하고 숙연했다. 신학적인 답변이 필요 없었다.“내가 성폭행을 당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요?”답은 그 커다란 눈물방울 속에 들어 있었다. 기독교 세미나에서 존 스미스는 그리스도를 변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정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얼굴과 인격을 보여 주었다.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와 교회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짜증 내기까지 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나와 교회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形像)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깊은 맛을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 스미스, 그가 흘린 눈물방울이 우리에게는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생명을 구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번영신학이라고 하는 가시적 교회 성장 논리가 집어삼켜 버렸기 때문이다(요일3:16). 세상을 감동시키는, 세상이 공감하는 거룩을 찾을 수 없는, 십자가가 없는 형해(形骸)만 남은 교회 아닌 교회를 붙들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성경을 펼쳐 본다.


비록 쪽방에 살면서 중국집 배달원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지라도 고아들을 돕고, 장기를 기증하고 세상을 떠난 그에게서 나와 교회가 답을 얻어 행동해야 다시 산다는 교훈을 얻는다. 이름 없는 중국집 배달원의 숭고한 이타적 사랑이 한국 교회에서 장엄한 드라마로 펼쳐지는 날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의미가 진리 안에 영생하는 믿음과 그 믿음이 이타적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이다.“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Maranat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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