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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 그것은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 - 이성재 목사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초겨울비가 내리는 을씨년스런 월요일에 세 사람의 동역자가 A 교회에 모였다. 오래전에 점심을 나누고 싶다는 초청에 응했던 터라 궂은 날씨임에도 만났다. 자연스럽게 위드 코로나 (With corona) 상황에 본질적인 교회관(敎會觀)에 입각한 다가오는 성탄절을 어떤 의미를 살려 어떤 형태로 예배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하는 대화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혼란한 시국을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 특히 마태복음 538절에서 42절을 떠올리며 혹시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느냐고 물은즉 가능하다고 해서 빅토르 위고의레 미제라블을 감상하기로 하였다. 두 동역자는 수동적으로 따를 뿐, 나의 생각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말이다.

빅토르 M. 위고(Victor Marie hugo, 1802-1885)19세기 프랑스 사회와 문단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계관시인 겸 소설가이며 정치가로서 인간을 향한 연민으로 가득한레 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16년 만에 완성한 작가이다. 감상한 영화는 뮤지컬로도 제작됐다.

레 미제라블은 가난과 폭력, 거짓과 술수, 반항과 도전, 꿈과 희망, 사랑과 실연 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인류의 진정한 평화와 희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성경적 신앙에 근거한 현답(賢答)을 시도한 훌륭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주목한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기 타락한 인간 세계의 고난과 저주를 경험하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다.

주인공 장 발쟝은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조카를 위하여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기소되어 19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의 어두움 속에서 살아야 했으며. 죽을 때까지 전과자와 범법자의 숙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형사 쟈베르 경감은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교조주의(敎條主義)에 사로잡혀 평생을 냉혈 동물적인 삶으로 살아간다. 그의 마음은 범법한 자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으로 가득 찼고, 그의 얼굴은 공평과 자비는 없고 오직 노한 얼굴로 사회 질서를 위하여 엄격한 법 집행만이 정의다 라는 비인간화의 표상이다.

팡띤느는 경제력을 상실하고 차가운 세상의 외면 속에 살면서도 사랑하는 딸 꼬제뜨를 위하여 몸을 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악하고 부조리한 구조의 희생자이다. 그녀는 무자비하고 부정한 인간들에게 짓밟히는 가난한 흙수저를 대변한다.

팡띤느의 딸 꼬제뜨를 맡아 기르는 떼나드리에는 탐욕과 폭력과 음모로 뭉쳐진 교활한 악한(惡漢)이다. 그와 그의 아내는 자기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이면 거짓과 술수, 폭력과 음모도 서슴지 않고 행동하는, 그야말로 인간의 양심이라고는 어디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쓰레기 부부다. 그러나 그들도 평생 탐욕을 위해서 애를 썼지만, 그들 속에 있는 탐욕의 바다는 채우지 못한 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다.

바리케이트로 대변되는 파리의 청년들과 대학생들은 폭력과 억압과 빈익빈 부익부의 부조리하고 악한 사회 구조에 저항한다. 그들의 꿈은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다.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무지로부터의 광명, 행복권을 추구하기 위해 무력으로 투쟁한다. 그들은 인간의 가치조차 유린당하는 불쌍한 사람들의 절망을 뛰어넘어 생명을 살리며, 장애를 걷어내는 데 관심을 집중시킨다.

2030 세대들은 장애만 제거하면 인간은 행복해질 것이라는 착각 속에 투쟁한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와 허망한 죽음뿐이다. 오히려 그들은 사회의 불만만을 조성하고 이 땅에서 사라진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투쟁했으며, 피를 흘렸는가? 그들은 과연 쓸모없는 삶을 살았는가? 그들이 희생함으로써 과연 세상은 달라지고 변화되었는가?”

하층민인 여관 주인 떼나드리에의 딸 예뽀닌느 역시 타락한 세상의 비극을 벗어나지 못. 그녀는 탐욕으로 꽉 찬 부모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가정 교육은 듣고 배우기보다 듣고 봄으로써 배워간다. 예뽀닌느의 부모는 자식이 스펙을 많이 모으면 행복한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고 믿으며 자식을 위해 헌신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기초조차 모르는 처사였다. 그녀는 젊은 대학생 마리우스를 죽도록 사랑하지만, 그것은 짝사랑이었을 뿐 그 많은 스펙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인생으로 생을 마친다. 이 세상은 타락의 결과로 저주와 고난과 죽음과 허망함이 지뢰밭처럼 지천에 깔려 있어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이것들을 피할 수가 없다.

빅토르 위고는 로마카톨릭 교회를 거부했다. 교회가 세상 속에 존재하여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정화해야 함에도 세상을 등지고 세상처럼 살아가는 속물적 성직자들의 삶에 침을 뱉을 정도의 분노가 쌓였기 때문이다. 당시 성직자들의 그와 같은 행태에 실망한 그는 이상적인 종교에 대한 자신의 바람을 미리엘 주교에게 투영해 드러냈다. 위고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미리엘 주교로 형상화했으며, 미리엘 주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준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 즉 신학은 예수님에 관하여 설명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삶으로 보여 준다는 교훈이 이 소설에 도도히 흐르고 있다.

또 한편, 법은 정의를 수립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법은 사회적 신분과 관계없이 공평하게 적용해야 정의롭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우리 사회에서는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조소 섞인 말이 회자되고 있는 것은 당시 프랑스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장 발쟝이 빵 한 조각을 훔친 것은 옳지 못했으므로 벌을 받은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5년 형을 받은 것은 너무 가혹하고 불공평한 판결임에 틀림이 없다. 사회적 신분이 미진하다고 중형에 처한 것은 가혹한 처벌이다.

부당한 처벌에 반발하면서 사랑하는 어린 조카를 두고 온 아픔이 너무 커서 몇 번의 탈옥을 시도했다는 죄목으로 형이 추가되어 19년의 세월을 감옥에 갇혀 살게 한 불공정한 법 집행과 냉혹한 제도는 그에게 있어서 원망스러운 통절함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출옥한 장 발쟝은 미리엘 주교가 기거하는 성당 주교관에 들어가 은촛대를 훔쳐 달아나다가 악연으로 얼룩진 자베르 경감에게 붙잡혀 미리엘 주교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때 미리엘 주교가 하는 말. 내가 형제에게 선물한 그 촛대는 왜 도로 가져오는 것이오? 형사님. 이 형제는 내가 사랑하여 선물로 주었소. 안심하고 가세요!”였다.

장 발쟝의 생애는 미리엘 주교와 함께 하는 세월이었다. 장 발쟝이 미리엘 주교를 만나서 변화되는 과정은 신자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 변화되는 성화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미리엘 주교의 사랑이 계속 자극하고 격려하여 쟝 발쟝을 새사람으로 일으켜 세웠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았듯이 주교의 촛대는 장 발쟝을 인도하는 불기둥이던 것이다. 장 발쟝은 은촛대를 바라볼 때마다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기억하며 자신의 행복을 희생으로 보답하는 것으로 스스로 약속하는 한편, 죽는 순간까지 주교를 예수님을 대신하는 분으로 여겼다. 장 발쟝은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모든 불행과 고통을 딛고 일어나 어둠을 걷어내고 자기 삶을 빛나게 만든 것은 미리엔 주교가 보여준 삶 그대로였다. 그는 숭고하게 살았으며 정직했다. 그의 일생 모두를 유린했던 쟈베르를 용서했다. 사랑했다.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미리엘 주교를 닮아가는 작은 그리스도가 되었다. 그의 삶은 사랑으로 가득했고, 그의 죽음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1:19)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성화과정이 그대로 승화된 모습을 위고는 이 소설에 담아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사랑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고고한 가운데 세상을 내려다보시는 분이 아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제물이 되고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구원의 주님이시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이다, 단순히 기뻐하고 즐거운 날이 아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사람들의 불행한 운명을 주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람들이 주님과 생명적 사귐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 강생하신 날이다. 여기서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고통을 동반한다. 사랑이 고통과 희생을 동반한다는 말은 추상적인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을 반영한 주장이다.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령을 들은 아브라함이 간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인내로써 순종하여 바침으로써 시험을 이겨낸(22:1-18) 여호와 이레사건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확인시켜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관념적인 이론이 아니라, 역사 속에 실체로 나타난 성육신 사건으로 바로 크리스마스이다. 따라서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 예수를 통해 구체적으로 역사 현장에 나타난 사건이다. 우리가 그 사건을 가슴 깊이 기억(remember)할 때, 그 의미를 알고 눈물 흘릴 것이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고통으로 가득했다. 예수님은 고통을 끌어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처럼 빅토르 위고는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에 담기어있는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미리엘 주교를 통해 잘 드러냈다.

이상 레 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실감 나게 보여주는 예화의 역할을 확실하게 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위드 코로나 시대인 2021년 성탄절을 어떤 의미로 맞이할 것인가? 갈등과 대결이 극에 달한 한국 사회에 우리 크리스천이 보여줄 기독교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야 하겠는가?

우리 세 사람은 영화 감상 후 서로가 숨결소리만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 던져 줄 분명한 메시지는 사랑의 회복, 곧 용서하는 사랑이 가장 필요하고, 유일한 답이라는 것을 공감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가르쳐 주신 교훈 최고의 복수는 용서다”(5:38-42)라고 외치고 싶은 나는 이 역사 현장의 한복판에 서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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