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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들 - 이성재 목사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요 며칠 사이 내 마음이 씁쓸한 것은 만추(晩秋)와는 이별을 준비하고 겨울을 만날 추위를 짐짓 걱정해서가 아니다. 하나는 11월 5일자 국민일보에 실린 이어령 교수와 김지수 기자의 인터뷰 기사 내용이다. 매주 화요일 김지수 기자가 이어령 교수 댁을 열여섯 차례에 걸쳐 인터뷰한 것을《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고 소개를 겸한 인터뷰 기사다. 이 교수는 이 인터뷰에서 “환생, 부활… 나는 그런 걸 믿지 않아. 기독교인이니까 겉으로는 받아들이지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사실 낫싱(nothing)이야.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절실할까, 끝이라고 생각하니 절실한 거야.” 고인이 된 그의 딸 이민아 목사의 간절한 소원에 따라 예수님을 영접하고, 도쿄 어느 호텔에서 하용조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부터 거금의 강사료를 챙기며 수많은 교회와 모임에서 간증과 강연을 했던 그는《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신앙 서적을 출판하기도 했다. 한 때는「양화진 포럼」에 이재철 목사와 대담을 하는 수준 높은 프로그램에서 자기 지식과 경륜을 마음껏 토해내기도 했던 그가 80년 대 초 평창동 새집을 짓고 나에게 집 구경 오라해서 초청받아 방문한 적이 있었고, 그와의 정담(情談) 중 예수의 복음을 제시한 필자에게 그는 가벼운 웃음으로 “나는 예수의 십자가까지는 인정하지만, 부활은 아니야”라고 했던 당시의 말이 생생히 재생되어 “여전하구나”하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속은 여전히 변함없는데, 겉만 기독교 신앙인으로 포장하고 비즈니스(?)를 했다는 것인가? 나와 동년배인 88세의 한국 최고의 지성인으로 존경 받고 있는 그가 암투병을 하는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도마처럼 고백하는 그날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가 성립될 수 없다는 성경의 핵심 교리를 일간지 신문 인터뷰에서 공식 부인했다는 것은 심각하다. 기독교는 지성인을 배출하는 종교가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 신앙으로 죄인 된 인간을 구속(救贖)하는 능력의 종교이다. 부활과 함께 이루어지는 몸과 영혼의 영광스러움을 부정하는 그 자체가 불신앙이 아닌가.


또 하나는 사랑제일교회와 전광훈 목사다. 사랑제일교회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2동에 있다. 문제는 장위10구역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을 둘러싼 조합과 교회의 갈등으로서, 그 핵심은「돈」문제가 걸려 있다. 보도에 따르면 장위10구역 재개발 사업은 2008년 재정비촉진계획 결정을 시작으로 2017년 계획 인가까지 받았으나, 사랑제일교회 건물철거가 지연되면서 10년 넘게 첫 삽을 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사랑제일교회의 현재 건물은 불법 건축물을 합해 연 건평 1천2백 평이며 지하1층, 지상2층 규모로 당초 보상액은 서울시토지수용위원회가 책정한 82억 원이었지만, 교회는 그의 7배에 가까운 563억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사랑제일교회는 조합이 제기한 명도 소송 1,2심에서 패소했으나, 법원이 제시한 157억 원의 보상안도 거부한 채 거액의 보상을 요구하며 철거를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전광훈 목사 측의 563억 원 요구의 근거는 지하 4층, 지상 7층의 건물을 짓겠다는 계획이며 그만한 건설비가 소요된다는 것이다. 법원은 지난해부터 11월 5일까지 총 6차례에 걸쳐 강제 명도집행에 나섰으나 교회 측으로부터 소화액 분사, 화염병과 돌 등의 투척, 심지어 새총까지 동원한 거센 저항에 번번이 실패하자 조합원 4백 여 명 중 대다수가 교회를 제외한 재개발사업 진행에 찬성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매달 10억원 가까이 발생하는 은행 대출이자와 1회 수천만 원에 달하는 용역비 등 금전적 부담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현실성 때문이란다. 필자가 여기서 전제하는 것은 교회는 대사회관계에 있어서 공공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부당한 피해나 불이익을 당해서도 안 되고,  혹여 그와 같은 상황이 서로 충돌할 때에는 정당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앞세워야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특히 몇 년 사이에 부동산 값이 대폭 올라 건물을 산다든가 신축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가 조합과 합의 하에 선순환적으로 재건축에 참여하는 4백여 세대와 주변에 그리스도의 덕을 세웠었으면 교회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역할을 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하는 부정적 이미지를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안타까운 심정이다. 한국 교회는 1960년 대 후반부터 교회 공동체의 본질이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①건물 중심의 교회 ②숫자와 규모 중심의 교회 ③제도 중심의 교회 ④프로그램 중심의 교회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사랑제일교회와 전 목사도 이 점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법원의 판결과 중재안도 거부한 점이 그렇고, 법원의 여섯 차례에 걸친 강제 철거에 교인들과 장정들을 동원해 막장드라마에 가까운 거친 충돌을 번번이 일으켰다는 점은 이유야 어떻든 정당화될 수 없다. 563억 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 측의 몫이다. 왜냐하면 11층에 이르는 건물을 짓는 비용은 법원의 중재안 157억 원을 뺀 4백 6억원은 교회 측이 충당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언젠가 전 목사가 이런 말을 했다. “신학교에서 3년 공부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내게 와서 6개월만 배우면 충분하다.” 이 말은 새로 건설한 공간에서 신학교도 개설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 아닌가? “하나님, 까불지 마. 내게 혼나…” 이런 이단 중에 이단에게 배울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되묻고 싶다.


교회라는 단어의 어원은 초대 교회 에클레시아(ekklessia)에서 비롯되었다. 에클레시아는 ek(밖으로)와 caleo(부르다, 모으다)의 합성어로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민회(民會)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중에 ‘칠십인역’에서 회중(會衆)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카할’을 헬라어 ‘에클레시아’로 번역하면서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종교적 회중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그리스도인의 회중으로 용어가 전이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의 모임', 곧 교회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어의 Church의 원뜻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교회는 성도(聖徒)들을 가리키는 바, 물리적인 건물과는 엄연히 다르다. 희생 제물을 바쳐 제사 드리는 성전은 희생 제사가 사라진 신약 시대에는 예배당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성도가 모여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장소로서 예배당은 제물을 바치는 유대 성전과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전과 예배당은 가시적 건물의 의미로 이해하고, 교회는 영적 의미로 성도나 성도의 모임으로 가름한다. 결코 예배당과 교회를 같은 개념으로 혼용해서도 안 되거니와 오늘날 ‘성전 건축’에 매달리는 한국 교회의 몸부림이 과연 성경적인가 깊이 성찰해야 한다.


또한 목사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글 성경에 ‘목사’라는 단어는 에베소서 4장11절에 딱 한 번 등장한다. “어떤 사람을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 부분을 해석할 때 너나없이 목사와 교사를 구별해 두 직분으로 해석하는데, 이 두 단어를 잇는 접속사가 ‘또는’(or)이 아니라 ‘그리고’(and)라는 점에 주목해 동일한 직분의 두 기능으로 해석하여 “목자요 교사로 삼았다”라고 해야 옳다. 목사가 왜 목자냐고 물을 것이다. 에베소서의 ‘목사’는 헬라어 ‘포이멘’(poimen)인데, 신약 성경의 구절마다 ‘포이멘’을 ‘목자’로 번역하고 있음을 주목하라(마9:36, 25:32; 눅2:8, 15; 막6:34; 요10:2, 11, 12, 16; 벧전2:25 등 다수). 마르틴 루터의 기독교 개혁은 ‘사제 성직주의’(司祭聖職主義)에 맞서 ‘만인 제사장주의’(萬人祭司長主義,벧전2:9)를 내세운 이유가 교회 내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수평적 관계라는 성경 본래의 위치로 되돌려 놓은 유기체로서의 교리이다. 직분은 다만 몸의 선순환을 위한 기능일 뿐이라는 것이 개혁자들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는 ‘목사요 교사’로 그리스도의 양을 잘 치는 ‘양치기’(shepherd)임과 동시에 잘 이끄는 ‘인도자’(steward)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참조)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성경적 ‘포이멘’은 교회의 지배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섬기는 종’(servent steward)으로 예수님의 형상을 드러내야 하는 사명자이다(마20:28). 그렇다면 사랑제일교회를 사수하고 탐욕을 성취하기 위해 “주님의 양들”을 선동하여 최전선의 싸움꾼으로 동원시킨 정광훈 씨는 그 영혼들을 멍들게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직권 남용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전광훈 씨에게 성경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고 싶다. 목자는 주인이 아니라 주인의 양을 보살피는 종이라면, 다치지 않게, 굶지 않게, 병들지 않게, 바른 길 가도록 잘 가르치는, 그리하여 주인의 소유를 정성스럽게 돌 봐야 하는 ‘양치기’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지 않겠는가? 간증이나 강연에서는 부활을 논하던 지성인이 죽음을 앞두고 부활을 부인하며 낫싱(nothing) 하는 것도 결국 목자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바른 목회를 위한 핵심 가치는 종으로서 주인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는 ‘순종의 신앙’이다. ‘말씀하신 대로’, ‘순전한 마음으로’, 주의 계명을 지키는 온전한 순종이 절실한 상황에 주님은 얼마나 통절히 슬퍼하실까? 한국 교회는 제2의 기독교 개혁이 일어나야 진정한 부흥의 동력(動力)을 다시 얻을 수 있다는 명제(命題) 앞에 순응하는 새 시대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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