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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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마르틴 루터가 주장하며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영광의 신학‘에 저항하여 95개의 조항의 반박문을 내걸었던 1517년의 기독교개혁은 칠흑 같은 영의 세계에 찬란한 빛으로 새벽을 열었다. 당시 로마가톨릭주의가 주장했던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란 십자가 신학과는 정반대로 고통보다 번영을 추구하고 내적인 면보다 외적인 면의 부강을 추구하는 현대 번영신학과는 별반 다를 바 없는 타락한 사상이었다. 즉 ‘영광의 신학’이란 외형적 부귀와 영화를 성취하기 위해 기독교를 택하는 사상을 일컫는다. 언제든 형통하고, 성공하고, 건강하고, 부유하기 위해 하나님께만 외형적으로 잘 보이면 된다는 바리새파 신앙이 곧 ‘영광의 신학’이다. 그 결과물이 웅장하고 위엄이 넘치는 ‘성당’이라는 화려한 건물의 경쟁적 건축 사업이었으며, 구원 받은 성도를 인위적으로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하여, 성직자는 교황을 정점으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한편, 수직적으로 계급화하여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사치스런 복식(服飾)으로 권위를 나타냈다. 결국 이에 따를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쥐어짜낸 방식이 반성경적인 ‘고해성사(告解聖事)’와 ‘면죄부(免罪符)’ 판매라는 악령적 죄악이었다. 평신도는 재원 창출의 노예에 불과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중세 천 년을 중세 암흑시대라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에 의식이 살아있는 선각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어두웠던 천 년의 긴 시대를 경멸하고 순전한 시대를 꿈꾸었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시대의 과거를 잊고 싶을 정도로 교회는 정치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혼돈과 공허, 흑암의 깊음 위에 태초의 빛이 비추었듯이 교권과 형식, 부패로 뒤덮인 중세 유럽의 잿빛 하늘을 환하게 밝힌 기독개혁의 위해한 영웅들을 일깨우신 하나님의 경륜은 놀라웠다. 전호에 밝힌 바대로 프랑스의 피터 왈도(발도), 영국의 존 위클리프, 보헤미아의 얀 후스, 이탈리아의 지롤라모 시보나볼라, 그리고 변질된 믿음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믿음의 본질인 ‘이신득의’(以信得義) 신앙 개혁을 공식화시킨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그들이다. 그리고 루터보다 10년 후, 27세의 나이로 불멸의 기독교 역작《기독교 강요》를 저술하고 혜성처럼 나타난 장 칼뱅(Jean Cavin,1509-1564)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사실 역사적으로 한 작품의 책으로 기독교의 진수(眞髓)를 그처럼 포괄적이고, 미래적이고, 성경적이고, 역사적이고, 실천적으로 기술한 이는 없다. 그래서 조지아 하크니스(Georgia Harkness)는 “16세기는 위대한 세기였다. 라파엘과 미켈란젤로의 세기요, 스펜서와 셰익스피어의 세기요, 에라스뮈스와 라볼레의 세기요, 루터와 칼뱅의 세기였다. 이 16세기를 위대하게 만든 이상의 인물들 중 칼뱅만큼 영구적인 공헌을 남긴 이는 없었다”라고 간파했다. 그리고 필립 샤프(Philip Sharp)는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과 그 작품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하나님의 도성》, 토마스 아퀴나스의《신학대전》, 칼뱅의《기독교 강요》를 꼽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도 바울의 교리를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교부하면,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으로 해석한 스콜라 신학자이며, 칼뱅은 아퀴나스의 신학 영역을 과감하게 탈피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교의(敎義)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 연구 결과를 특수하게 적용한 신학자요, 저술가요, 또한 교회 정치가라고 극찬했다. 앞서 언급했거니와 사실상 기독교개혁을 일으킨 사상적 주역(Promoter)은 마르틴 루터다. 그러나 그 개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주인공(Composer)은 장 칼뱅이다. 전자가 개혁의 터를 마련한 우직한 기초자라면, 후자는 그 터 위에 신학의 집을 세운 섬세한 건축가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칼뱅은 스위스 취리히의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1484-1531)의 개혁운동으로부터 비롯된 개혁파 교회의 초기 유산을 이어받았지만 츠빙글리의 추종자는 아니다. 그는 루터와 같이 온화한 성품과 풍부한 유머와 인간적인 다양한 재능을 지닌 예언자적 인물은 아니었지만, 루터보다 교회 개혁 면에 있어서 더 실제적이었고, 성경 해석은 논리적이고, 지성의 명석함에 있어서도 더 위대하고 탁월했다. 칼뱅 안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세 가지 힘은 차가운 지성과 예리한 양심과 불같은 의지였다. 그는 시와 음악을 참되게 평가했으며, 그의 주석들에는 성경의 정확한 의미를 찾으려는 간절한 소망과 주관적 편견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엄격함, 그리고 박학한 지식과 논리로 일관하는 천재성이 어느 곳에든지 깃들어 있다.《기독교 강요》의 중심 사상은 한 마디로 “위대하신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장 칼뱅의 그러한 영적 지적 경륜은 어떻게 그렇게 풍성함으로 축적되었을까?
칼뱅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소도시 누아용(Noyon)에서 주교의 비서이자 경리로 일하던 게라르 코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파리대학과 몽태귀 대학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전공했으며, 19세 되던 해 아버지의 권유로 오를레앙 부르주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훗날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세네카의 저서인《관용론》에 대한 주석서를 출간하여 큰 호평을 받았지만, 1533년 친구인 파리대학 니콜라스 콥 (Nicolas Cop)의 학장 취임 연설 원고 - 천주교 관점에서 볼 때, 에라스뮈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 - 를 써 준 일로 파리를 떠나 은신해 지내면서 초대 사도 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가톨릭교회와 결별하게 된다. 그리고 ‘돌연한 회심’(回心)에 의해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입장을 분명히 하게 된다. 1535년 프랑스 국왕 프란수아 1세의 박해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주야로 연구하여 1536년에 자신의 걸작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박해를 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에 대해 변호하고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저술한 것이었다. 바젤에서《기독교 강요》를 출판한 칼뱅은 귀향길에 오르려는데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간의 전쟁으로 이를 포기하고 스위스 제네바를 갔다가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을 만나 그의 뜻을 좇아 제네바에서의 기독교 개혁을 이루는 한편,「제네바 신앙고백서」와「교리문답서」등을 출판하게 된다. 그러나 시의회와 성찬 회 수의 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제네바를 떠나 스트라스부르로 옮겨 마르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를 만나게 된 칼뱅은 18세 연상인 부처가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서 교회를 섬기는 법과 목회자로서의 자세, 기독교 교육과 관련한 다양한 정신적 지도를 받게 된다. 한편, 칼뱅을 떠나보낸 제네바는 혼란의 도시로 변하자 제네바 시의회는 칼뱅만이 제네바를 정상화시킬 수 있는 지도자로 재인식하여 정확히 3년 4개월만인 1541년 9월 13일 칼뱅을 제네바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 《기독교 강요》는 1559년 최종 완결편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제네바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와서 개혁신학을 배울 수 있게 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한 권의 책으로 기독교 신학과 신앙을 정리한 사람은 현재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칼뱅의《기독교 강요》는 신학,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엄청나게 영향을 끼친 사상적 영향을 지면상 일일이 서술할 수는 없지만,《기독교 강요》에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의 영광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음은 경이롭다 하겠다. 칼뱅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한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의인이라고 가르친다. (칼뱅의 5대 교리, 참조).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은 칼뱅의《기독교 강요》를 떠나서는 쉽게 이해되거나 적절하게 논의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 2회에 걸쳐 16세기에 일어났던 유럽의 기독교개혁은 2천 년 교회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이 기독교개혁운동은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적 타락상과 윤리적 부패상들을 고발하면서 순수한 복음의 본질,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회복하려는 순교적 노력이었다. 필자가 열거한 개혁자들 외에도 많은 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성경적인 대안을 적절히 제시함으로써 복음적인 개혁교회를 이루는 데 크게 공헌하였던 것이다. 그 결정판이 개혁자 장 칼뱅의《기독교 강요》라고 단언할 수 있다. 기독교 개혁의 거울에 비추어 본 21세기 오늘의 한국 교회는 중세 암흑시대 로마가톨릭교회의 모습과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 내 자신의 부끄러운 부패성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