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04년 전 1517년 10월 31일 정오 무렵, 비텐베르크성 교회 정문에 33살의 젊은 사제 마틴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붙였습니다. 이 행동은 세계사에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새겨졌습니다. 우리는 지난 수년 동안 ‘한국교회는 로마가톨릭과 닮았다’는 진단까지 내리며, 종교개혁의 정신을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지 치열하게 검증하고 비판했습니다. 종교개혁 504주년을 맞은 우리는 이제 새로운 500년을 시작하며 “어떻게 종교개혁의 정신을 후대에 올바로 전해줄 것인가?”에 답해야 합니다. 그 대답 역시 성경과 종교개혁 반세기 역사와 개혁신학 속에 담겨 있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개혁과 부흥, 사회의 변혁을 열망하는 한국교회에 어떤 조언을 해줄까요? 저출산, 고령화, 이혼율, 자살 1위, 북핵위기 등등 한국 사회의 미래 전망은 어둡기만 합니다. 사회에 희망을 주고 변혁의 주체가 돼야 할 한국교회 역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504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자기개혁을 통해 사회변혁을 이루고자 노력했습니다. 아직 열매는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개혁을 추구한다면, 어둔 밤의 밝힌 십자가 불빛처럼 이 시대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개혁을 일궈낼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1990년대 이후 침체와 하락으로 들어갔습니다. 100년 동안 성장만 경험했던 교회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은 2007년 평양 대 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극적으로 표출됐습니다. 철저한 회개를 통해 다시 부흥하기를 염원했습니다. 그러나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수년 전부터 본질을 회복해서 다시 부흥하길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침체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개혁과 부흥의 열망이 연이어 깨지는 상황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어떤 말을 해줄까요? 위클리프가 1353년 “낙심하지 마세요. 우리도 로마가톨릭을 비판한 이래, 후스와 루터와 칼빈과 1559년 장로교회를 세운 녹스의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까지 200년이 걸렸습니다. 무엇보다 개혁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지치지 말고 매일 개혁을 향해 나아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위클리프 이전에도 프랑스의 왈도(왈도파)는 4복음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1177년 복음의 본질을 추구했습니다. 체코의 후스는 교회개혁을 외치다가 1417년 화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이렇게 종교개혁은 짧게 200년, 길게 400년 동안 진리를 향한 긴 여정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이제 시작입니다. 다행히 교회는 변치 않을 성경이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 한국교회가 ‘오직 성경’을 주일에 교회 안에서만 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오직 성경’ 속에서 도출한 만인 제사장 론을 거부하고, 오직 믿음과 은혜의 구원론이 흔들리고, 믿음의 열매인 선행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한국의 유교 사상, 기복 전통, 자본주의 속에서 체득한 물질만능주의 등이 신앙(성경)과 함께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오직 성경’이 아닙니다. 개혁이 이루어질 수도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영적 권위의 토대이고 그 토대 위에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세웠습니다. 성경과 함께 권위를 갖고 있던 교황과 교회의 전통과 수많은 성물 성상(우상)을 무너뜨렸습니다. 성경 외에 다른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개혁 이전으로 회귀입니다. ‘오직 성경’은 구호가 아닙니다. ‘오직’을 빠뜨리고 성경이 우리 신앙과 삶의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지키고 후대에 물려줘야 할 ‘오직’의 의미입니다.
“진리는 세상을 덮을 만큼 광대 합니다” 로마가톨릭은 중세 유럽인들의 영혼과 사상과 정치와 사회와 문화,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곧 종교개혁이 ‘사회 전반의 개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원론적 신앙으로 신앙과 생활을,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신앙의 개혁, 교회의 개혁을 통해 세상을 변혁시킨 종교개혁과 너무 다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개혁을 통해 정치(의회와 정부)를 변혁시키고, 문화와 예술과 과학에 자유를 부여하고, 자유와 평등의 개념으로 사회와 사람들의 일상을 바꿨습니다. “루터의 만인 제사장 론으로, 칼빈의 ‘모든 진리는 성령의 역사’라는 주장으로, 모든 학문은 얽매여 있던 로마가 카톨릭에서 벗어났습니다. 스스로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됐습니다. 특히 칼빈의 개혁은 ‘성경적인 총체적 개혁운동’이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교회 안에 가두지 마십시오. 진리는 강하고 광대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고 절대주권을 믿는다면, 성 속 이원론과 교회와 세상의구별은 비 신앙입니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총체성을 회복해 후대에 물려줘야 합니다.
“연대 못한 우리 실수 극복해야합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2011 한국의 종교현황 조사연구>자료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는 등록한 교단만 232개라고합니다. 교회의 분열은 오늘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교회의 분열 문제는 종교개혁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성례 문제로 대립하며 결국 분열했던 루터와 츠빙글리는 한 예에 불과합니다. 각 지역별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고 가톨릭의 박해가 극심할 때, 종교개혁의 후손들이 서로를 핍박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결국 이런 분열 때문에 유럽의 개혁교회는 연대하지 못했고 불과 100여 년 만에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성례론 그리고 세속권력에 대한 이해차이 등으로 갈등하고 결국 손을 잡지 못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개혁교회가 힘을 합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의 실수를 기억하고 진리 안에서 힘써 연합하여야합니다.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은 신학의 문제로 분열했지만, 한국교회는 신학의 차이보다 정치와 권력 문제로 더 극심하게 분열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후대에 물려줘야 할 유산은 연대이고 통합입니다. 역사적으로 개혁교회는 부흥과 침체를 반복했습니다. 16세기 유럽의 개혁 교회들을 시작으로 청교도를 통한 미국 개혁교회도, 카이퍼를 통한 신 칼빈주의도, 그리고 한국교회 역시 그렇습니다. 왜 침체했는지 살펴보려면, 어떻게 부흥했는지를 이해하면 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인문주의의 시대정신과 부합했고 사람들의 일상과 밀접했습니다. 청교도의 신앙 역시 그 시대 미국의 상황 속에서 생활 규범이었습니다. 카이퍼는 근대 시대 속에서 칼빈주의를 재해석해 영역주권으로 정부와 사회를 이끌었습니다. 개혁신학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칠 때, 영향력이 있었고 부흥했습니다. 칼빈은 신학이 교회와 목회를 위한 것임을 <기독교 강요>에서 강조했습니다. 성도들의 삶과 개혁신학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백 년전 발생한 종교개혁을 넘어선 새로운 종교개혁의 불꽃을 점화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한국교회에 필요한 종교개혁의 방향은 교회 혁신이나 교회 혁명이나 신학 운동이 아니라 복음의 순결을 회복하는 본래적 회복운동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역설하고 싶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복음으로 돌아가자. 예수께로 돌아가자고 강하게 피력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이 하나 되어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대로 본래적인 기독교 신앙과 복음으로 회복하여 복음적인 교리와 신학, 영적인 갱신과 부흥을 형성하는 한국교회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를 향해 소금의 맛을 내고 생명의 빛을 발해야 할 것입니다. *혁명이란 한번 크게 일으키는 것이지만, 개혁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