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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름스 종교개혁자 동상 앞에 서서 - 이성재 목사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나는 30여 년 전, 유럽 여행 중 독일 엣센에 살고 있는 처남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처남 내외는 휴가를 내어 종교개혁의 중심지 브름스를 안내해 주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거기에 세워져 있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비였다. 루터 동상이 중앙에 서 있고 그 주위에 네 명의 전 종교개혁자 동상이 앉아 있었다. 피터 왈도(Peter waldo, 1402-1206?), 존 위클리프(John wyclife, 1330?-1380), 얀 후스(Jan Hus, 1370-1415),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다. 그 동상 앞에 서니, 우리가 종교개혁하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장 칼뱅(Jeam cavim, 1509- 1546)을 떠올리는데 이들에 의해 종교개혁이 태동하는 데에는 이미 왈도, 위크리프, 후스, 사보나롤라 등과 같은 목숨을 내놓고 싸운 선각자들의 개혁 운동(Reformation)이 그 원인을 제공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그 감회가 새로웠다.


∎ 피터 왈도는 프랑스 리옹 출신으로 부유한 장사꾼이었다는 것 외에는 그의 출생, 그의 죽음 등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자세히 알려진 바가 전혀 없으나, 평생 전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노숙자처럼 살면서도 주위 사람들을 다방면으로 도우며 프란체스코(Francesco d'Assisi, 1182-1226)와 동일한 삶을 살면서 ‘리옹의 가난한 자들’이라는 왈도파가 탄생하게 한 개혁자였다. 왈도파는 라틴어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왈도의 가르침을 본받아 자국어로 된 성경을 유럽 여러 곳으로 다니며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1179년 3차 라테란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프랑스어 성경을 로마 교황에게 증정했지만, 오히려 이단으로 정죄 당하였고, 유럽 전역에서 핍박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결국 13세기 알바파 십자군 운동(1209-1229)으로 인해 수많은 왈도파 성도들이 학살을 당하였다. 하지만 그루터기 신앙은 결코 죽지 않고 훗날 기욤 피렐(Guillaume Farel, 1489-1565)이라는 걸쭉한 개혁자를 배출하여 장 칼뱅을 도와서 제네바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일으킨다.


∎ 존 위클리프는 영국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이다. 옥스퍼드대학교 수학 후 동 대학 신학·철학 교수로서 사상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mus)의 영향을 받아 “성경만이 기독교의 유일한 근거”라는 입장에서 교황 정치의 폐단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교황권이나 성직자의 위계성에 기초한 교회 제도나 성인숭배(聖人崇拜), 속죄, 수도시의 탁발 등의 관습에 단호히 저항(Protestant)하는 한편, 교의(敎義)면에서는 화체설(化體說)을 부인하였다. 또한 회중을 위해서는 성경의 자국어 번역과 ‘청빈 강설자단’의 파견 등 개혁 활동에 주력하였다. 한편, 그는 옥스퍼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그의 이론에 따르는 ‘가난한 전도사’(Poor Preacher)란 단체를 양성했는데, 이 단체가 일반 국민들에게 새로운 신앙 사상으로 전파되자 영국 국왕은 자신의 권위가 약화될 것을 두려워했고, 대학의 특권을 취소한다는 협박에 대학이 승복함으로써 옥스퍼드의 자유정신이 상징적으로 사라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사후에 그도 역시 콘스탄츠공의회로부터 이단자로 선고를 받지만, 그의 사상은 면면히 이어졌으며, 또한 저서는 체크의 개혁자 얀 후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 얀 후스는 보헤미아(지금의 체코)의 종교개혁자로서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고 교황을 비롯하여 고위 성직자들의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하는 한편, 체코 민족 운동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저항하였고, 1414년 콘스탄츠공의회에 소환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그는 보헤미아 남부 출신으로 프라하대학교에서 신학과 문학을 배우고, 1398년 프라하대학교 교수로 신학을 강의하였으며, 총장직에까지 올랐다. 한편, 1400년 로마가톨릭교회 사제로 서품을 받아 그곳의 베들레헴 성당 주임신부로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의 성경 해석을 받아들여 예정구원설(豫定救援說)을 강조하며,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이른바 당시 일반화되었던 성직매매 등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또한 체코 민족 운동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정면으로 저항하였고, 프라하 대주교 즈비네크의 후원을 얻어 대학 내에서의 체코인의 권리를 신장시켰으며, 1406년 체코어의 정자법(正字法)을 확립하여 성경과 위클리프 저작물을 체코어로 번역하였다. 교황은 후스에게 그동안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명령했으나 불복하자 교황 요하네스 23세는 1411년에 후스를 파문하였다. 그러나 후스가 진리는 영원히 불변하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자 1414년 콘스탄츠공의회에서 후스를 소환, 그의 저서에 이런 사상이 지목되는 부분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고, 결국 1415년 콘스탄츠 교외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상과 같은 왜곡된 정치적 판결은 체코인들의 공분을 일으켜 1419년부터 1439년에 걸친 후스전쟁을 유발시켰다.


∎ 사보나롤라는 이탈리아의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이자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이탈리아 북부 페라라 출신으로 1491년 피렌체의 성 마르코스 수도원 원장이 되어 교회 혁신을 위한 강설과 예언자적 언사로써 성도들을 지도하여 시민의 정신적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당시 르네상스 절정기에 있던 피렌체는 사보나롤라가 보기에 타락과 방종 그 자체였다. 이교도의 신들, 인간의 감성과 육체가 표현된 예술 작품을 쓸어 없애버려야 할 죄악 덩어리였다. 따라서 피렌체를 엄숙함과 경견함 대신 타락한 도시로 만든 메디치 가문(15-16세기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세습 통치)은 그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피렌체 시민이 예수 믿기와 예수 닮기의 경건한 기독교인의 삶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는 동시에 “회개하라, 심판 날이 다가오고 있다. 모두 불타고 말 것이다”라고 외쳤으며, 그의 열정적 도전은 피렌체 시민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웠다. 특히 메디치 가문의 무자비한 권력에 분개했던 시민들은 사보나롤라를 열렬히 추종하였고, 그의 예언대로 1494년 프랑스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으로 폐전하면서 피렌체가 신정국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메디치 가문은 몰락하였고,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통치자로 세움 받게 되자,


인간 중심의 예술에 탐닉했던 피렌체 시민들은 금욕적인 경건한 본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의 수장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사보나롤라를 파문하고 강설을 금지시켰지만, 그는 오히려 교황이 음탕하며 성직 매매를 한다고 비난하며 퇴위할 것을 주장하였다. 제프리 초시(Geoffrey Chaucei)가 쓴 <켄터베리 이야기>에 나오는 표현처럼 “성직자들은 무식했고 성적으로 타락한 시대였다. 피렌체의 사보나롤라를 화형시킨 교황 알렉산드로 6세는 늘 매춘녀와 놀아났고, 바티칸 숙소는 나체쇼를 즐기는 음탕한 곳”이 되고 말았다. 종국에 교황은 독살 당할 정도였으니 그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의 영적 세계가 얼마나 사탄적이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한편, 사보나롤라의 신정 정치는 일부 유흥업자들의 불만과 선동, 피렌체의 오랜 경기 침체가 겹치는 가운데 파문당한지 1년이 지난 1498년 5월 23일 그는 이단으로 몰려 그를 추종하는 두 명의 도미니크회 수도사와 함께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거룩한 순교였다.


그가 죽은 지 9년 후인,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다. 1521년 1월 3일,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파문처분을 받는다. 그 당시 성직자에게 파문은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날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를 탄생시키시는 출발점이 되게 하셨고,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철옹성 같은 권위를 무너뜨리고, 네 개혁자들이 이미 하나님의 교회가 어디를 갈 것인가를 방황하지 않고 죽음으로 제시했던 방향성을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답을 찾았다. 성경의 시대와 가장 가까운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개혁 운동의 단초가 저 유명한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대학교의 교회당(슐로스키르헤, Schloskirche) 입구에 붙인 「95개 조항」에서 역역히 보여 주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인가? 루터의 95개 조항의 1항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라’(마4:17)고 하셨는데 그 의미는 성도들의 삶은 회개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95개 조항에서 루터는 교황을 비롯하여 모든 사제들도 오류가 있는 인간이며 사죄권이 없다고 비판하며 면죄부(免罪符)는 진리를 어둡게 하는 죄악이므로 판매를 금지할 것을 성토하면서 죄 용서와 심판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임을 강조한 내용이었다.


단연 마르틴 루터의 동상을 둘러싼 왈도(프랑스), 위클리프(영국), 후스(체코), 사보나롤라(이탈리아) 등 전 유럽에 걸친 종교개혁의 주역들을 한 자리에 조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특히 루터의 95개 조항에 답을 못할 수밖에 없는 로마가톨릭교회 교황과 성직자들에게는 성경에 기초하여 바르게 주장한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etia), '오직 그리스도만으로‘(solus Christus)라는 성경 본래의 외침이 들렸을 리 만무하다. 당시 브름스 방문자였던 나의 조국 한국 교회에도 성경을 벗어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던 시기요, 젊은이의 탈교회현상이 두드러지게 시작하는 때였다. 그 후유증과 속앓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파괴가 종교개혁의 중요한 과제였음에도 계속 ‘평신도’라는 단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스스럼없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교회에 ‘평신도’는 없다. 개혁자들은 그들 사이의 교회가 개혁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신앙의 후배들에게 계속적인 개혁을 부탁하였다. 즉, “한 번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항상 새롭게 되도록 스스로를 개혁해야하겠다는 의지와 실천력이 있어야 살아있는 교회다. 장 칼뱅(Jean Calvin(1509 ~ 1564)에 관하여는 후술할 기회를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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