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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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잘못이라 인정하지 않고 자기 합리화시키려고 잘 둘러대는 고사성어 (故事成語)가 있다. ‘수석침류’ (漱石枕流)가 바로 그것이다. 그 유래는 이렇다. 중국 진(晉) 나라의 사대부 손초(孫楚)가 젊은 시절 속세를 떠나 초야에 묻히겠다고 소망을 밝히며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을 작정(漱石枕流)” 이라고 뒤집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친구 왕제(王濟)가 “돌을 베개로 삼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하겠다는 것(枕石漱流)을 잘못 말한 것 아니냐?” 라고 지적했다. 손초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는커녕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齒)를 연마한다는 뜻이고,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 다는 것은 (쓸데없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귀를 물로 씻겠다는 의미” 라고 즉석에서 둘러댔다.
여기에서 ‘수석침류’의 여러 뜻이 비롯되었다. 첫째는, 궤변(詭辯)이다. 실수인 줄 알면서도 남에게 지기 싫어 끝까지 억지를 써 우기는 견강부회(牽强附會)다. 둘째는, 언변 실수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뛰어난 재치로 그 상황을 벗어난다는 임기응변(臨機應變)이다. 셋째는, 은둔 생활(隱遁生活)이다, 아예 숨어사는 것이다.
‘논어’에는 실수와 관련한 구절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소인은 실수하면 반드시 꾸민다(小人之過也 必文)가 대표적이다. “내 탓이오” 보다 “네 탓이오”를 말하고 싶은 인간 심사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범죄와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의인과 소인을 가르는 기준은 범과나 실수 여부 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솔직함’에 있다. 바로 ‘인간됨의 자세가 어떠함이냐’이다. 수석침류식 대처는 사태를 악화시키고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인정받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자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 (눅 22:54-62). 베드로의 통곡과도 같은 참회와 자기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할 만큼 어려운 용기로 이 결단은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소설 <순교자>에 등장하는 주인공 신 목사와 같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원숙한 신앙인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베드로와 같은 부끄러움의 회심과 꿀꿀한 사과는 그 본질이 다르다. 말을 돌리거나, 누르거나, 뒷자락을 남기면 “미안하지만 사실은 미안하지 않습니다”인 것이다.
컬럼비아대학교 에덤 D.갤런스키 교수 연구진은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언제, 어떻게의 다섯 가지 요소로 나누어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 지침(謝過指針)을 제시하였다.
‘누가(WHO)’; 사과 주체는 중대 사안일수록 실무자가 아닌 고위 책임자가, 주어(主語)가 분명하게 죄송함(잘못)을 표해야 한다.
‘무엇은(what)’; '잘못을 인정함’ 곧 사과의 내용에는 솔직함, 뉘우침, 변화의 의지와 대책이 반드시 담겨야 한다.
‘어디서(where)’는 육성으로 들려주는 직접 구두 자복(소통) 일수록, ‘언제(when)’는 신속할수록, ‘어떻게 (How)’는 형식적·공식적 표현보다 개인적인 감성과 소회를 진하게 담을수록 효과적이다.
영락교회 설립자 고 한경직 목사는 ‘청빙’과 ‘겸손’ 의 상징으로서 한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목회자로 손꼽힌다. 그분이 1992년 템플턴 상을 받았다. 템플턴 상은 미국 태생의 영국인 존 템플턴(sir. John Templeton,1912-2008)이 재단을 설립하고 기금을 마련하여 제정한 상으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린다. 한 목사의 템플턴 상 수상은 본인은 물론 한국 교회에 대단한 명예였고, 수많은 기독교인이 이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다. 그분은 개척했던 영락교회를 세계에서 유례없는 대형 교회로 성장시켰고, 수많은 개척 교회와 초, 중, 고, 대학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영락보린원 등 사회복지 시설을 설립 운영하는 공을 인정받아 명예로운 템플턴 상을 수상한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청빈’과 ‘겸손’이라는 그분의 인격이 결정적이었다. 1992년 6월 18일 여의도 63빌딩 코스모스홀에서 열린<한경직 원로목사 템플턴 상 수상 축하 예배>에 필자도 초청받아 참석했었다. 한 목사는 인사말에서 “나는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신사참배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자리에 설 수 있게 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분이 템플턴 상을 수상하기 전까지만 해도 본인이 신사참배를 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를 기산(起算)하더라도 한 목사의 공적인 회개의 소회는 장장 54년이 걸렸다고 할 수 있다. 전호에 소개한 바 있는 남대문교회를 담임했던 김치선(金致善) 목사는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 조국이 해방되자 개인적으로 또는, 강설을 통해서 눈물로 회심을 표시하였다. 그분에게 눈물의 예레미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한 목사 역시 그분의 기념사업회에서 운영 중인 홈페이지 (www.hamkyungchik.org)에는 “이 결점(신사참배 가결)으로 괴로워하던 그는 환상 가운데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라는 문구로 죄 사함을 표시하고 있다. 그분의 입장을 믿을 수밖에, 한편 이 말을 미루어 볼 때,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회심과는 성격이 다르겠으나, 그분이 살아온 삶의 궤적은 수석침류 형이 아니라 ‘침석수류’(枕石漱流)의 54년, 아니 주님 앞과 민족 앞에 평생 죄인 된 심령으로 살아온 거룩한 몸부림, 즉 절대 의존의 관계 회복의 생애의 열매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몸으로 실천했던 당시 동역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끝까지 동조하지 못했던 아픔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1)서슬이 퍼랬던 일제 강점기 무자비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당국과, 영향력 있는 기관 또는 인사들을 찾아가 민족의 수탈과 탄압, 나아가서 민족 말살 정책인 반기독교적 신사참배 강요를 즉시 중단할 것을 청원 내지 경고했던 ‘신사 참배 강요 금지 청원 운동’ 인사들 대한 심경, 2)일제의 강요와 제도권 교회의 불법적 결의에 순교를 각오하고 끝까지 저항(protestant)하며, 신앙과 교리를 지키고자 했던 ‘신사참배 거부권유운동’ 등에 앞장섰던 인사들에 대한 심경이 그것이다.
평안남도의 박관준(朴寬俊) 장로와 안이숙(安利淑) 여사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국회와 정부 요로를 찾아다니며 위와 같은 거국적 교회의 요구를 호소하는 용기 있는 애국운동을 하였다. 국내적으로는 주동 인사로 하여금 이상과 같은 신사참배 강요금지청원운동과 신사참배 거부권유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던 대표적 목회자는 다음과 같다. 평남은 주기철(朱基徹) 목사, 평북은 이기선(李基善) 목사, 경남은 한상동(韓尙東), 주남선(朱南善)목사, 전남은 손양원(孫良源) 목사, 한남은 이계실(李啓實) 목사, 만주는 박의흠(朴義欽), 김형락(金炯洛), 김융섭(金隆燮) 목사 등 여러분의 순교를 각오하고 행동하는 신앙 동역자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과 민족 앞에 한 목사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청빈’과 ‘겸손’으로 참회한 자의 청교도적 삶을 사시다가 주님 나라에 가셨다고 생각되지만, 판단은 하나님께 있다. 성군 다윗 왕을 보라, 그는 자기 범죄를 고백하기를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라고 토해 냈다. 둘러댐도 핑계도 그에게 전혀 없었다. 전인격적이고도 의지적인 깨달음의 고백이었다.
숨 쉬기조차도 눈치 보이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 일상이 초토화되고 삶의 의미마저 꺾여 버린 오늘, 시류와 영합을 거절할 줄 아는 청교도적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나서야 할 자리는 다윗처럼, 바울처럼 진정한 회개와 그리스도 신앙이 융합된 회심의 그리스도적 삶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 재차 호소하고 싶다. 정치와 이념은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정치와 이념은 확증편향(確證偏向)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고 갈등과 분열의 아픔을 겪기 마련이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냄에 있다(Sola Deo Gloria!).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다.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틀어서 우리는 회심(回心)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회심이 경험되어질 때,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을 한다”(침석수류)는 정직한 삶이 세상을 화평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화평케 하는 자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서든지 그리스도인은 정직하고 반듯해야 화평은 빛난다. 어느 한 정치인의 일갈이 마음에 꽂힌다. “이 세상에 ‘핑계’로 성공한 사람은 가수 김건모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