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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에 사는 사람들(1) - 이성재 목사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나의 생애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영적 스승이 세 분 계신다. 세 분 모두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늘 마음에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간직하며 살아감이 행복이다.


황성수(黃聖秀) 박사님, 최태섭(崔泰涉) 장로님, 최창근(崔昌根) 장로님이 그분들이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어느 누구나 “저분 같으면 믿고 따르겠다”는 ‘섬김’(stewardship) 의식이 농익은 지도자라는 점이다. 내가 CBMC 사역을 통해서 얻은 가장 귀한 자산이다. 하늘나라에 뜻을 두고 나라를 먼저 걱정하는 애국심을 가진 책임감 있는 기독인이셨다. 진정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사셨던 분들이다. 그래서 요즘과 같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에 누가 나에게 기독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차원 높은 애국심을 지녔던 위 세 분을 거침없이 들 것이다.


먼저 최태섭(1910.8.26-1998.5.31) 장로님을 회상해 본다. 그분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민족 계몽과 독립 운동의 요람인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려고 뜻을 세웠는데 선친께서 사업을 하여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성격상 알맞겠다는 말씀을 따라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업하기가 일제 치하보다 수월한 만주 봉천(지금의 중국 야오닝성 선양)에 가서 시장 조사를 한 결과 그 광활한 대지에서 주생산물이 옥수수와 콩이어서 부가가치가 높은 콩기름생산회사를 설립하여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공산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종업원 4백 명의 큰 기업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그분은 학생 때, 이미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직과 성실로 애국하는 정신과 오산학교 설립자로 교육자이며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측 대표요, 독립운동가인 남강 이승훈 선생의 실천하는 예수 정신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아 뜻을 세웠다고 회고하셨다. 내가 그 어른을 CBMC중앙 회장으로 모시고 있을 때, 큰 행사가 있을 때면 끝난 다음에는 꼭 사무국 스텝들을 위로하는 만찬을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늘 당부의 말씀으로 ‘신앙’을 강조하셨는데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끊을 수 없는 믿음,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철두철미한 신뢰 유지요. 특히 기업의 생명은 신용’이라고 하시면서 “정치가는 정치를 통해서 국가에 봉사하고, 학자나 예술가는 학문과 예술 작품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듯이, 기업가는 그 기업을 통해 경제적 혜택을 인류 사회에 제공하는 책임을 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라는 당신의 확고한 가치관을 피력하시면서 기업을 개인의 소유로 생각 해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셨다.


그분은 일화도 들려 주셨다.


해방 당시 봉천(선양) 지방에 공산당원들이 들어와서 인민재판을 했다고 한다. 기업체 사장들을 비롯하여 부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는 인민재판을 벌였다. 공산당 재판 책임자가 “이 사람을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거기에 모인 주민들이 죽여야 한다고 하면 그냥 처형하는 식이었다. 최태섭 장로님이 한국 사람으로서 그 지방에서 가장 큰 공장을 경영하다가 인민재판을 받게 된 것인데, 그분의 차례가 되어 책임자가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갑자기 주민들이 다 조용해졌다고 한다. 잠시 긴장감이 흐르는데 조용함을 깨고 한 중국인이 “이 분은 우리 집 살림 형편이 정말 어려워서 애들을 학교에도 못 보내고 병원에서 고생할 때 도와준 아주 좋은 분입니다. 제발 살려 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호소했단다. 그러자 주로 그 공장 종업원들과 많은 주민들이 다들 그렇다고, 그분 참 좋은 분이라고 거들어서 자신이 살아남았고, 그 회사 중국인 상무가 최 장로님을 중국인으로 변장시켜 국경선 단통까지 데려다 주어 압록강을 건너 고향 정주로 올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신이 구사일생으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중국인 김 상무에게 여비를 빌렸는데 그 돈을 갚지 못해 늘 애태운다는 말씀에 그분의 삶의 진실함에 머리가 숙여지기까지 하였다. 장로님이 고향에 머무는 기간도 잠시 북한의 공산당이 전체주의 체제로 갖추며 더욱 살기가 등등하여 인간이 살 수 없는 수용소화하는 정치적 위협을 느끼자 자유를 찾아 서울로 넘어와 다시 홍콩 무역을 활발히 하는데 북한의 남침으로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 또다시 위기를 맞이했다. 당시 한국은행에서 사업자금을 융자 받은 금액이 적지 않았는데 북한인민군이 한탄강을 건너 의정부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에 돈 될 만한 것을 팔고 회사에 있는 자금을 모아 대출금을 갚으려고 한국은행을 찾아가자 은행은 이미 기능을 완전히 잃고 마비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 장로님은 급히 은행 총재를 찾아가 대출금을 건네자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 긴급히 철수해야 할 위급 상황이라고 고사했지만, 기어이 갚고 영수증을 받아 돌아와 장로님 가족도 부산으로 피난했다. 기업하던 분이 임시 수도 부산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을 하였으나 자금이 문제가 되어 한국은행을 다시 찾아가서 얼굴을 내밀자 간부 한 사람이 최 장로님을 알아보고 총재에게 안내되어 재회의 기쁨을 나누게 되었다. 이미 총재가 임시 경무대 이승만 대통령께 최태섭 사장의 미담을 보고해 놓은 터라 만나게 되면 칭찬을 해야겠다고는 언질이 있었기에 대통령을 뵙게 됐고,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국방장관에게 지시하여 제주도제1육군신병훈련소 식재료납품을 최 사장에게 맡겨 훈련병에게 양질의 식사를 제공하도록 하여 뜻하지 않게 그 사업을 감당하였다는 것이다. 휴전이 되고 수도가 서울로 수복 후 「유엔한국부흥단(UNKRA)」에서 중요 기업인들을 초청하여 기업 아이템을 나열해 놓고 선정토록 했는데, 최 장로님은 완전히 폐허가 된 서울을 떠올리며 국가 재건에 판유리가 절대 필요하다 확신하고 유리 생산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운크라로부터 승인을 받아 한국유리공업(주)을 창설하고 인천에 판유리공장을 세워 독점 생산으로 전국에 공급하였으나 판유리의 품질 개선에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판유리 기술력과 기계의 세계 제1은 단연 영국이라 정부재정보증을 받지 않고 직접 교섭에 들어갔는데, 영국 측에서 한국유리(주)의 신용을 인정한다는 파격적인 결단에 의해 군산 제2공장을 세워 양산을 보급함으로써 오늘날 세계적인 양질의 판유리와 자동차 유리를 생산하는 회사로 발전시켰다. 전적으로 최 장로님의 인격이 담보가 된 셈이다.


그분은 사업의 목적을 성공에 두지 않았다. 능력이 미치는 데까지 사원들을 도와주고 그들이 행복하고 인간답게 살도록 해주는 것이 기업의 첫 번째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 목표를 이루려면 이윤을 먼저 내야 하므로 기업 간 경쟁 때문에 이를 이루기가 어렵다고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복지」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던 80년대에도 한국유리는 이미「사내 복지」가 시스템화 되어 있었고, 사원 스스로 퇴사를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회장님과 임원 입에서 그만 두라는 말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한 가지 미담으로, 1948년부터 최 장로님의 운전기사로 거의 평생을 함께 했던 분이 퇴직하게 되었는데, 최 장로님은 그 기사로 하여금 군산판유리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전국 각 지점으로 운송하는 유통회사를 설립, 운영케 함으로써 제2의 인생을 경영자로 우대한 일화는 유명하다.


고 최태섭 장로님, 그분은 진정한 기독실업인이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참 애국자이셨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으로 계시면서 그 생 안에 조찬기도회를 조직하여 당시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기업체 오너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비즈니스 세계에 최태섭 장로님과 같은 참된 기업인이 국가 경제를 이어 나가기를 기대하며 기도한다. 최태섭 장로님, 그분은 진정 사명에 사는 분이셨다. 참으로 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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