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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賣國)과 애국(愛國)사이 - 이성재 목사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6월 6일은 현충일이다. 조국의 독립에 목숨을 바치신 독립유공자와 6.25한국전쟁, 월남전쟁 등 나라와 국제 사회 평화를 수호하다가 순국한 장병들을 기리는 날이다.


이날에 나는 모윤숙(毛允淑)시인의 전쟁 시 두 편을 소개한다.


첫 번째 시는 <지원병에게>다.


눈부신 산 모퉁이 / 밝은 숲속 / 힘찬 기운 떠오는 하늘 밑으로 / 가을 떨기를 헤치며 들어갔노라.
기슭을 후리고 지나가는 / 억센 발자국 / 몸과 맘의 뜨거운 움직임을 / 칼  빛은 태양 아래 번개를 아로삭여 / 힘과 열의 동산 안에 내 맘은 뛰놉니다.
눈은 하늘을 쏘고 그 가슴은 탄환을 물리쳐 / 大東洋의 큰 理想, 두 팔 안에 꽉 품고 / 달리며 큰 숨 뿜는 正義의 勇士 / 그대들은 이 땅의 광명입니다.
大和魂 억센 앞 날 永劫으로 빛내일 / 그대들 이 나라의 앞잽이 길손 / 피와 살 아낌없이 내어바칠 / 반도의 남아, 희망의 花冠입니다.
가난한 이 몸이 무엇을 바치리까? / 황홀한 창검이나 금은의 장식도 / 그대 앞에 디림 없이 그저 지냅니다.
오로지 끓는 피 한 목숨을 죽여 보태옵니다.
지난 날 이 눈가에 기뜨렸던 어둠을 / 내 오늘 그대들의 우렁찬 외침 앞에 / 다-맑게 씻고 새 계절 뵈옵니다. / 다-맑게 씻고 새노래 부릅니다.


두 번째 시는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서사시의 머리 부분이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 누런 유니포옴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리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중략)


1951년 문성당(文星堂) 출판사에서 출간한 시집 「풍랑」에 실린 총12연 90행의 서사시로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국군 소위가 나라의 행복을 위한 자신의 희생이라는 대승적 자아의 승리를 노래하며 조국을 위해 한줌 흙이 되었다는 반공시(反共詩)이다.


독자는 모윤숙 시인이 쓴 이 두 편의 시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연약한 여성에게서 강렬한 애국심을 느끼는가?


모윤숙 시인(1910-1990)은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함흥보통학교, 개성의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그리고 이화여자전문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으로 북간도 신명여고, 서울 배화여고에서 교편 생활을 하면서 1933년 시 “빛나는 지역”으로 문단에 데뷔한 여류시인이다.


위에 소개한 두 시 세계를 들여다본다.


놀라지 말라. 첫 번째 시는 일본군국주의가 1941년 12월 8일 미국 하와이 진주만 해군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한 축인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모윤숙은 그 다음 달 1월호 잡지 「삼천리」에 이 전쟁 시를 기고하였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을 하나의 몸)가 된 조선의 청년은 이 전쟁에 지원병으로 출전하여 목숨 바쳐 일왕에게 충성하는 것이 정의의 용사라는 독려의 시다. 그녀의 친일 행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1945년 7월 일본의 패전 직전까지 국민총력조선연맹 창설자로 시와 글로 순회 시국 강연으로 종횡무진하며 조국의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8월 15일 일본은 패망했고, 우리 조국은 해방의 자유를 맞이하였다.


동시에 남한은 미군정(美軍政)이 시작되자 모윤숙은 능통한 영어 실력을 매개로 하여 그 매국노(賣國奴)가 발 빠르게 애국열차(愛國列車)로 갈아타고 1947년 10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UN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는 실력(?)을 발휘하는 한편 정부 수립에 깊이 관여하는 재주를 보였다.


모윤숙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심판의 대상이었으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친일 청산 와해정책으로 날개를 달게 되어 반공 투사로 변신하여 제5공화국까지 한국 문화계는 물론 명예와 권력으로 화려한 생애를 누리다 갔다. 1979년「황룡사 9층 석탑」이라는 시로 3.1문화상을 수상했고, 말년에는 예술회 회원이었으며, 1991년 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나는 역사 문제, 특히 일제 강점기에 친일 부역한 인사들의 기록을 읽고 큰 충격과 함께 몹시 당황했었다. 민족의 거목이라고 흠모했던 분들이 실인즉 민족 반역자였다는 사실에 분노를 넘어 허탈한 시간도 보냈었으니까 말이다.


시문학이 인간의 영혼이나 사고, 또는 사상에 끼치는 영향은 잴 수 없을 만큼 지대하다.


첫 번째 시를 읽은 그 당시의 젊은이 중에는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도 있어 감동 받아 일본군에 지원하는 자들도 있었으리라.


그 지원병에게 박수갈채를 보낸 개념 없는 인간들도 꽤 있었으리라.


두 번째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내 가슴에 용솟음치는 애국심을 주체 못하게까지 감동을 받아 눈물까지 흘린 시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공분이다. 「렌의 애가」에 심취했고, 위 시의 감동한 젊은 나이에 전사한 이름 모를 국군을 애도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막연한 애국심 같은 것이 나를 감동케 했다. 또한 그런 그녀가 매국노였다는 사실(fact)은 그 이상으로 배신감도 상대적으로 컸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모윤숙은 한국판 현대사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 하나의 애증에 불가하다.


즉 친일 세력이라는 악화(惡貨)가 민족혼에 불탔던 독립투사라는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 세월 속에 지금까지 우리는 살아왔다. 그것도 억울하게 그녀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그녀가 변절한 데에는 소설가 이광수의 권유가 결정적이었고, 1938년 9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일본 정통종교 신사 참배는 국민의례라는 결의와 실행이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제2차 세계대전의 다른 한 축인 유럽 전선도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고 다시 국권을 회복한 프랑스의 샤를르 드골 대통령(1890-1970)은 나치 독일에 부역한 자들을 철저하게 처단했다. 2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처형하여 국제사회에서는 그를 파시스트라고 비난을 쏟아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프랑스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특히 언론인들과 문필가들의 나치 부역을 용서하지 않았다. 9백 여 종의 신문 잡지 가운데 나치에 협력한 694종은 가차 없이 폐간을 단행했고, 재산 몰수로 처벌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자와 집필가 9천4백 명을 처형하였다. 설령 프랑스가 다시 국권을 잃는 일이 있더라도 과거와 같은 매국적 행동자는 생겨나지 않을 것 같은 조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충일에 우리나라를 생각하는 나로써 우리 대한민국의 정체성(Identity)이 아직 미완성인 점에 마음이 무겁고 구석구석에 잠재된 매국(賣國)의 합리화가 언제쯤 반듯하게 애국혼으로 회복될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오늘은 6월 6일 현충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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