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역사학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명언입니다. 6월은 나라사랑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즉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충성과 넋을 기리는 달입니다. 말 그대로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분들의 공훈에 대해서 보답을 하고, 나아가 나라의 의미에 대해서 되새기는 달입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잊고 싶고,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잊어서는 안 될 ‘민족상전의 비극’을 뒤돌아보면서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소망합니다. 역사를 알아야 내일을 알고 미래가 보입니다. 6.25전쟁 이후 지금의 이와 같은 평화로운 시기는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아~아~ 어찌 잊으랴 우리 그 날을…. 이 순간에도 맑고 포근한 햇살을 마주할 수 있음에 깊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귀한 영혼들이여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두 손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시간의 흐름은 참으로 빠릅니다. 하루하루 바쁘고 정신없이 살다보면 오늘이 며칠인지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6월이 오면 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과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나라를 지키다 순국하신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특별히 올해는 6.25전쟁 71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나라 안 밖의 정세는 많이 변했고, 한국전쟁에 대한 세대 간의 사실인식과 그 해석에도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71년 전 이념과 사상전쟁 때문에 한반도는 피로 물들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역사교육의 부족으로 그 전쟁의 참혹함을 모르나 6.25전쟁은 우리 민족의 가장 비극적 수치요, 참혹한 상처였습니다.
북한의 침략으로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 전쟁이 바로 6.25전쟁입니다. 이로 인해 민간인을 포함하여 500여만 명이 죽었고 1천만 이산가족이 발생했습니다. 부모 잃은 아이들은 거리에서 울부짖었고, 남편 잃은 아낙네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습니다. 일제 36년간의 압박과 설음에서 벗어나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0분(일요일) 일제히 38선을 넘어 소련 탱크를 앞세워 내려오는 적군을 소총으로 막을 길이 없어 육탄 용사들이 몸으로 막았습니다. 불과 3일 만에 서울에서 대전으로 정부를 옮겨야 했고, 미국은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국제 연합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고, 이제 남한의 전 국토는 대구와 부산만 남겨 놓은 채, 적화 통일은 시간문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때, 맥아더 국제 연합군 총사령관은 낙동강 전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낙동강은 그야말로 양측에 피로 물들었던 강이었습니다. 인민군은 여기서부터 후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수도 서울이 함락 된지 3개월 만에 맥아더 사령관이 지휘하는 UN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9월 15일)에 성공함으로써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그 후 모든 전선에서 유엔군과 국군은 파죽지세로 북진을 거듭하여 이번에는 거꾸로 평양이 함락되고 두만강, 혜산진까지 진격하여 곧 통일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기치 않았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951년 1.4후퇴입니다. 국토통일을 눈앞에 두었을 때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여 인해전술로 반격해왔습니다. 그때 전투야말로 얼마나 처절했는지 모릅니다. 결국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3년을 끌어오다가 서로 지친 상태에서 좀 쉬었다 하자고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어 68년이 되었습니다.
∎ 1.4후퇴 흥남부두 철수작전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하여 원산과 평양을 함락시키고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습니다. 1950년 11월 27일 유엔군 사령부는 동부 전선 후퇴 명령을 내렸습니다.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에서는 대규모 중국군에 완전히 포위된 미 해병 1사단, 미 육군 7사단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퇴로를 뚫고 있었습니다. 중국군의 원산 점령으로 육로는 이미 막힌 상태라서 국군과 유엔군은 흥남 부두를 통해 해상 철수를 준비했습니다. 이 후퇴 작전이 1.4후퇴의 시작이었습니다. 흥남철수작전은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습니다.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17,500대의 각종 차량, 35만 톤의 물자를 함정으로 완전하게 철수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군 지휘관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남행을 결심한 피난민 9만여 명까지 포함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항공기를 이용해 병력 3,600명과 차량 196대, 1,300톤의 물자를 철수시켰습니다. 흥남철수작전은 대규모적인 육해공 합동작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 같은 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상당한 전투력을 보존해 다음 단계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매서운 추위와 함께 눈보라가 흩날리는 흥남부두는 군인들과 각종 물자를 비롯하여 남녀노소 구분 없는 피란민들이 함께 승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송선은 몰려드는 피란민으로 공간이 부족하여, 부모 형제가 한 배를 타지 못하고 서로 떨어져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수송선이 차례로 떠날 때마다 흥남 부두는 눈물바다로 변하였습니다. 피란민을 실은 수송선은 삼척, 부산, 거제도 등 여러 지역에 나뉘어 정박하였고, 이산가족이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애환은 가수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랫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수송선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기 위해 함포 사격과 공중 폭격이 밤낮없이 이루어지는 동안 흥남으로 집결한 국군과 유엔군 부대들이 12월 15일 해상 철수를 개시하여 12월 24일 미군 제1 해병사단 등 마지막 철수 부대가 승선할 때까지 약 10일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철수 작전의 절정은 12월 23일 흥남항을 탈출한 7,600톤 규모의 화물선인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일어났습니다. 최대 1천 명을 예상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에 따라 배에 실었던 무기를 전부 내리고 무려 1만 4천 명의 피난란들이 타는 장관이 연출되었습니다. 항해한 3일간 단 한명의 피란민들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고, 오히려 장승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 있었습니다. 1950년 12월 24일 마지막 엄호 부대와 폭파 요원들이 해안을 떠나고, 흥남항은 굉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이배를 타고 피난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개마고원과 백두산에 대한 애착이 각별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미처 철수하지 못한 전투 물자들과 항만 시설을 공산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폭파한 것입니다. 흥남 철수 작전은 비록 모든 피란민을 다 구할 수는 없었지만, 군사적 철수를 완료함과 동시에 10만여 명의 피란민들이 함께 북한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의 철수 작전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흥남 철수 작전은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인도주의적인 작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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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1-06-24 14:1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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