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① 하나님은 인간의 도덕적 삶을 위하여 만든 (필요한) 우상(偶像; idol)이며 ②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가 아니며, ③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없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조작인가> 49쪽을 인용하여 보자.
“그럼에도 칸트는 당시의 기독교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신학자들은 그를 인정했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역사비평 신학자들까지도 그를 새로운 시대의 선구자로 영접했다. 나는 루돌프 불트만이 우리 학생들에게 이야기한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우리는 칸트 이후에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칸트 이전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생각하는 것은 이제는 용납이 안 된다. 이렇게 해서 칸트 철학은 신학에서 모두 따라야만 하는 법칙이 되고 말았다.”
“신학자들이 칸트의 철학을 진리로 받아들였으므로,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버린 것이다. 그들이 돌보아야 할 신학생들에게도 하나님의 계시로 통하는 문과 영생의 구원 길을 막아 버렸다. 다음의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해당한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세계관, 인생관, 신앙관이 성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형성된다. 그럼에도 칸트 이후의 모든 신학자들과 대부분의 카톨릭 신학자들은—약간의 복음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칸트의 철학을 잣대로 삼았다.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조작인가> 50을 인용하여 보자.
“칸트는 철학을 통해서보다, 간접적으로 신학을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 철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기본 사상은 문학을 통해서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칸트의 생각을 회화적으로 서술했다. “저승의 세상은 우리의 눈에 차단되었다네. 눈을 밝히어 그 쪽을 보려는 자는 바보일세!” 이런 방법으로 모든 고등학생과 교양을 넓히고자 연극을 찾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이 칸트의 책을 한 문장이라도 읽지 않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자유주의 신학:
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①칸트의 철학을 받아들인 최초의 개신교 신학자 ②근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아버지 ③자유주의 신학의 시조”로 평가되고 있다.
슐라이허마허가 1799년에 출판한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에게 보내는 종교론(On Religion: Speechs to its Cultured Despisers)>은 자유주의 신학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였다.
과학의 출현과 발전은 ‘모든 것을 과학의 잣대로 검증하여야 한다’는 시대정신을 낳았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과학 시대의 도래(到來)로 퇴출의 기로(岐路; crossroads)에 선 종교(기독교)를 ‘도덕적 삶의 도우미’로 재해석하여, 종교(기독교)를 퇴출의 위기에서 구했다”고 자부했을 지도 모른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과학주의 시대정신에 맞추어 재해석하여, 기독교를 변호하려는 노력으로서, 신학의 근거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의존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신학사상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감정으로부터 신학사상을 도출한다. 신학이라고 하기 보다는 인간학이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