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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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2030세대, 즉 MZ 세대의 분노가 대단하다. 아니 ‘분노’(anger)을 넘어 ‘공분’(be morally indignant)하는 사회 분위기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공평’(impartiality)하고 ‘공정’(official fixture)해야 할 통치자의 국정 운영이 단견적 온정주의(溫情主義)f로 엇나갔기 때문이다. 그 실례의 하나가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사건이었다.
빛내서 대학 과정을 어렵게 마치고 공직에 취업하기 위해 엄청난 출혈을 감내하면서 ‘기회’(chance)를 보고 있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그 ‘기회’를 박탈하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부 대권 주자들이 경쟁적으로 1천만 원, 3천만 원, 세계 여행 경비 1억 등 ‘공약(空約)’을 남발하여 그들을 돈의 미끼로 삼았다는 것이 휘발유를 끼얹은 셈이니 한심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2030세대, 즉 MZ 세대로 일컬어지는 신세대의 세계관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지 못한 기성세대가 여전히 그들은 혁신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단순 논리에 안주하고 있다가 대단한 역풍을 만난 것이다. 1980년 초반부터 2천년 대 초반 출생한 밀레니엄(M) 세대와 1990년 초반부터 2천년 대 초반 출생한 Z세대를 아우르는 세대의 합성어가 MZ세대다.
이들은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고 스마트폰 등 모바일이 일상화 되어 있고 현 시대를 주도하고 있음으로써 기업과 광고업체 등도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연령층이다. 한 마디로 특정 지으라고 한다면, 스마트폰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세대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탈 이념적 실용주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주의 사고로 살아가는 세대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인 양승함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20대는 과거 세대와는 달리 상당히 실용주의적이고 탈 이념적이다. 자신들의 기회, 공정성을 상당히 중요시 한다. 이념보다 기회, 취업, 부동산에 우선 가치에 두다 보니 현실정치와 권력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많이 하게 된다.”
MZ세대가 ‘공분’을 갖게 된 이유는 잘못된 온정주의가 바로 그들의 희망을앗아간 박탈감이었다.
그들의 기회를 말 한 마디로 빼앗아감으로써 불공평, 불공정한 운동장으로 기울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들이 공분하는 이유인 것이다.
오죽하면 이들은 3포 세대라는 자조적인 말을 노골적으로 뱉을까? 연애 포기, 결혼 포기, 출산 포기, 거기다가 이제는 취업 포기, 내 집 마련 포기를 더해서 5포 세대라고도 하며 꿈도 희망도 없는 삶에 비관하여 N포 세대로 통칭하기에 이르렀다.
일 자리는 줄어간 데다 최종 합격률이 고작 2%인 공무원 시험에 몰리고 있는 판에 온정주의 실책으로 그나마 기회까지 박탈 당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19세에서 24세를 대상으로 낸 통계에서 “결혼은 반드시 할 필요가 없다”는 응답이 61%, “결혼은 해도 아이 없이 살겠다.”는 응답이 60%라는 통계도 보았다. 정말 힘들고 암담한 시대다, 이 땅의 청년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인구는 줄고 초고령화 시대는 시간문제다.
청년기는 인생 전체에서 장래 문제로 가장 고뇌하고 갈등하는 시기임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우리 사회가 이 세대들에게 그들이 설 곳을 마련해 주지 않아 그 애태우는 심정이 청년 스스로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버렸다.
이런 답답한 시대에 하나님의 청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이렇게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가? 과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 상태로 놓아 두실 수 있는가?” 그렇다고 이렇게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면서 마냥 탄식만 할 수 없지 않는가?
부유했던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 비해 빈손으로 도망 나와 돌베개를 베고 잤던 야곱이 떠오른다. 20년 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종 노릇했던 야곱의 모습은 오늘 N포 세대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야곱의 고된 인생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를 속였기 때문에 자업자득이 된 것인가?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태어난 운명을 바꾸어 보려는 몸부림이었다. 거기다가 형의 장자권을 차지하기 위해 강제로 빼앗은 것도 아니고 팥죽으로 정당하게 샀을 뿐이며(창25:27-34), 아버지를 속인 것도 엄밀히 말해서 어머니의 전략이었다(창27:5절 이하). 아버지 이삭은 그가 속은 것을 알고도 야곱의 축복을 무효화하지 않았고 에서를 달랬을 뿐이다.
아브람함의 언약의 복을 받기 위해 야곱은 이삭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왜 그에게는 말 뿐인 축복이었을까? 외삼촌 라반을 향해 8백 키로 머나먼 길을 가는 야곱에게는 다양한 두려움과 원망이 있었을 터. 그러나 낯선 곳에서 돌베게를 베고 잔 다음 날 아침 야곱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야곱의 삶을 이끌어 온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힘의 비결은 선택한 백성은 어디를 가든, 또한 어떠한 처지가 되든 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과 외롭고 괴로울 때일수록 하나님은 은혜와 위로로 더욱 크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꿈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야곱이 벧엘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자다가 꾼 꿈은 도망자의 악몽이나 가위눌림이 아닌 황홀한 꿈이었다(창28:12,13). 여호와께서 ‘사닥다리 위’에서 계셨다는 것은 임마누엘 하나님을, 그리고 하늘과 땅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 사닥다리에 계셨던 하나님, 우리는 우리가 밟고 사는 땅이 전부인양 살지만 여호와는 사닥다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존재를 알게 하셨고, 야곱은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셨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전부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재산, 지위, 권력, 인간 관계, 현재의 답답하고 초조한 나의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에게 주신 복과 야곱의 변화, N포 세대 속에서도 초월적 능력으로 우리가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비결은 우리 스스로 상식이 통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이며, 공평과 공정이 일상화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야곱의 생애에서 교훈을 얻는 용기가 필요한 때다.
한편, 정부는 국가 부채를 고려하여 현금으로 청년 실업을 달래는 복지 개념의 재정 정책을 지양하고 우리 대한민국의 우수한 두뇌 자원을 십분 선용(善用)하는 정책으로 개편하여 혁신 창업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인적 자본을 확충 강화하는 데 재정을 과감히 투입하여 더 많은, 더 고른 기회(chance)를 창출하는 기회 복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미합중국 전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의 명언을 되새겨 본다.
“기독청년은 삶의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 타인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 타인보다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약함을 극복하는 것, 타인보다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아지는 것을 노력하는 아름다움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높아지려는 욕구를 버리고 섬기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옳은 말이다. 우리 교회도 국가 사회도 이와 같은 높은 차원에서 상식이 통하는 공평하고 공정한 멋진 나라를 만들어가야 앞으로의 세대에 희망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