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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제1부 어머니는 바보야 25회

공저자 윤 기

목포공생원 원장

공생복지재단 회장 

- 1942년 목포 출생

중앙신학교(現 강남대학교사회사업학과를 졸

아동복지시설목포공생원의 원장

정신지체장애인시설공생재활원을 설립

한국사회복지사협회 부회장회장(1987~2001)을 역임

- 1989년 일본 최초의 재일동포를 위한 노인복지시설고향의 집을 건립

- 1978년 제22회 소파상등 수상다수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이사장

저서는김치와 우메보시역서는괴짜총리 고이즈미흔들리는 일본》 《고령사회 이렇게 살아보세가 있다.



공저자 윤문지(타우치 후미애)

공생복지재단 이사장

 

-1949년 일본 오사카 출생

쿄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

- 1972한국 목포로 건너와 목포공생원 생활지도원 역임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 이사사회복지법인 윤학

자공생재단 이사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3회 여성휴먼다큐멘터리 대상에양이 한 마리로 입선

- 1982나도 고아였다로 일본 크리스천신문 제5회 아카시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




천장은 강당과 연결되어 있었다. 상당히 높고 넓었다. 그리고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쥐들이 몰려다니는 소리만이 요란하게 귀에 들렸다. 초조함과 배고픔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님께 제발 이 밤이 새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보니 범치 형이 팔짱을 끼고 눈을 부라리며 서 있었다. 나는 움찔했다. 하필이면 무서운 범치 형에게 걸리다니.

범치 형은 내 손을 붙들고 우물가로 갔다. 얼굴을 씻어주려는 건가 했더니 굵은 동아줄로 내 몸을 얽어 묶는 게 아닌가? 원아들은 재미있다는 듯 우르르 떼 지어 구경했다. 범치 형은 내 몸을 들어 올리더니 냅다 우물 속에 집어넣었다. 아찔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사과해. 두 번 다시 나쁜 짓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꺼내준다.”

우물 위로 보이는 작은 사각의 하늘을 범치 형의 험상궂은 얼굴이 덮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또 할 거야?”


대답 안 하면 이대로 떨어뜨린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동아줄이 점점 내려졌다. 몸통이 수면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가 되었다.

대답해! 꺼내줄 테니까!”

범치 형의 목소리가 우물 안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이제 안 그럴께!”

내가 외쳤다.

뭐라고?”

안 하겠다고!”

내 몸은 슬슬 공중으로 올려졌다. 나는 밧줄에 묶인 채 이글거리는 눈길로 범치 형을 쏘아봤다.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애써 울음을 참았다. 그러나 동아줄이 풀리고 범치 형이 내 곁에서 떠나가는 것을 본 순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분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번번이 이런 일로 어머니를 난처하게 했던 나였지만 어머니는 항상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한 번도 나에게 특별한 시선을 보내준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공부하기가 싫다

 

수업 중이었다. 배꼽 근처가 근질근질했다. 곽 선생님은 열심히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혁대를 풀어 배꼽 근처에 손을 갖다 댔다. 이가 있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제기랄!”

우리들의 잠자리는 마치 이 양성소 같은 곳이었다. 모두 몸에 수십 마리의 이를 키우고 있었다.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으나 잡히는 놈이 없었다. 마침내 나는 셔츠를 걷어 이 수색에 들어갔다. 굉장했다. 얼마나 피를 빨아먹었는지 책상 위에 놓고 손톱으로 누르는 순간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어 나왔다. 나는 정신없이 이 잡기에 열중해 있었다.

어라. 이 녀석!”

선생님이 소리치며 다가오셨다. 나는 후다닥 셔츠를 고쳐 입었다.

나가서 저 문제 풀어봐!”

칠판을 쳐다보았다. 전혀 모르는 문제였다.

엉거주춤하고 있는 나를 보고 곽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기야! 넌 공부가 제일 싫다고 했는데, 어머니를 좀 생각해 봐라. 일등을 해도 부족할 판에 허구한 날 딴전만 피우고 있다니. 녀석 혼 좀 나야겠다 웃옷을 벗어라!”

나의 등에 저는 1학년입니다라는 종이가 붙여졌다.

나는 복도에 나가 꿇어앉았다. 공교롭게도 옆 교실은 여자 반이었다. 쉬는 시간에 쏟아져 나온 여자아이들은 내 모양을 보고 킥킥거리며 지나갔다.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수치심과 괴로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까짓 공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 흥미가 없어서 안 하는 것뿐인데 왜 야단이야? 대체 공부는 왜 하는 걸까? 수학을 모르는 것이 무슨 죄가 되나? 공부는 취미 있는 녀석들에게만 시키면 되지 않는가? 나는 학교 가는 일이 고역만 같은데 왜 학교에 보내려는 걸까? 그리고 몸이 가려워서 잠시 긁었는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나는 반발심에 열이 올라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곽 선생님은 호락호락 용서해 주지 않으셨다. 아니 얼굴 한 번 보이지 않으셨다. 아이들이 귀가해 버린 교내는 쥐죽은 듯이 고요해 정적만이 감돌았다. 외로움이 밀려왔다. 나는 등에 표찰을 붙인 채 3시간은 더 앉아 있었다. 슬리퍼 소리가 복도 끝 편에서 들려왔을 때, 그제야 나는 살 것 같았다. 이제야 풀리는가 보다 하는· 안도감과 함께 까닭 모를 비참한 마음이 교차했다.

 

(다음 26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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