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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논단]가정 이야기 - 김근열 목사




김근열 목사
(본지주필, 기독교한국신문논설위원
군남반석교회담임목사)



그 옛날의 어머니는 무엇이건 부지런히 일하셔서 십남매를 먹여서 살리셨다.


왜냐하면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6.25전쟁 후 폐허가 되어 수많은 고아와 과부들이 있었는데 민족적으로 그야말로 수난을 겪는 초근목피의 가난에 시달리는 시절이었다. 그때의 보리개떡은 지금의 임실치즈피자 보다 더 맛있었다.


아버지는 추운겨울에도 독천장에 나가셔서 자식들 위해 일을 하시고 돌아오시면 독천장터의 냄새가 아버지 옷에서 나면 그때는 그것이 땀 냄새 인줄도 모르고 장터냄새라 생각하며 좋아했다.


아버지가 좋으니까 아버지의 어떤 냄새라도 다 좋았던 것이다.


사실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 차석을 위해서도 그전부터 서울로 유학을 보내서 가르쳤지만, 그때 인생은 온갖 고생한다고 잘사는 것만이 아닌 것을 알았다.


쌀 100석을 보증을 스셨다가 떼어먹고 도망간 길독 씨를 걱정하시던 아버지.


아무리 착해도 착한만큼의 대가가 꼭 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그 당시 700평의 집터 텃밭에는 배추, 상추, 갓, 시금치, 부추 등 채소가 가득하고 언제나 풍성해서 독천장날이면 어머니는 머리에 그것들을 이고 가신 후 날아갈 듯 빨리 오셔서 온 가족에게 시끄럽도록 웃음꽃을 피우셨다.


옥자누님은 내가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 시집을 가셨는데, 양영희 신랑이라는 이름 때문에 여자에게 시집간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이다.


성애누님은 시부모님의 대소변을 받아가며 끝까지 최선을 다하시더니 지금은 두 분다 목포남부교회 권사님으로 섬기고 계신다. 남편 박점동 권사님도 성경을 정자로 5권을 쓰셨다.


누님들은 엄마처럼 친절하게 타일러주시고, 무화과 농장에서 좋은 것들을 지금도 주신다. 간장, 된장도 누님들의 솜씨가 정말 맛있는듯하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면 맛도 더 좋은 듯 한 것이다.


우리 가정에 본래 십남매가 살아가는데 획기적인 빛이 비추인 것은 내가 예수 믿고부터다. 아버지는 새벽3시가 넘으면 새벽기도 가라고 깨워주시면서 소 키우시며 소죽솥에 불을 피워 따뜻하게 데어서 소님께 드린다. 소를 어찌나 사랑하시는지 먹이는 것부터 지극정성이라 소를 모시고 살았던 것 같다. 동내서 제일 크게 멋진 황소를 키운 것이다.


둘째 성애누님은 나뿐만 아니라 가족을 위해 부모님 다음으로 온갖 희생을 다하신 분이다. 예수 믿고 나서 늘 눈물을 보이신 누님의 그 눈물은 지금도 새벽마다 내 눈을 젖게 만드신다.


마음씨 넓은 권사 모순이 동생부터 이순, 찬순 동생들, 형님 기도 덕분이라고 외친 좋은 남동생 주택동생과 동호, 동구, 동균 착한 동생들이 지금도 모두다 장로, 권사, 집사로 예수를 믿는다.


영암 삼호읍의 매자리 교회를 내가 다닐 적에는 배기주 목사님과 박문원 목사님이 계셨는데 김근열 교회라고 부른 사람들이 많았다.


공직생활당시에는 출근도 교회 들러서 퇴근도 교회 들러서 왔다.


결론은 이제는 그 십남매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은혜 속에 복을 받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우리 부부에게는 영원한 은혜라고 큰딸은 은영, 빠른 은혜 은민, 아름다운 은혜 은미, 곧은 은혜 은정이라는 자녀들이 있다.


민혁, 현우, 주원, 로운이의 엄마들 빼면 서운할 듯 큰사위는 고경철 목사(영광읍 주사랑교회) 서광일 집사, 김민성 집사, 임성훈 장로까지다.


인생은 고생해서만 잘 사는게 아니다.


예수 믿는 가정에서부터 출발해보자.


이 생명을 다 바쳐도 재를 남길 수 없는 예수의 은혜를 가정에서부터 심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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