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현답(賢答)은 세상을 살맛나게 한다 - 이성재 목사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19세기 헝가리가 낳은 피아니스트요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일화다.


그가 여행 중 어느 조용한 소도시에서 쉼을 갖기로 하고 묵을 호텔을 찾아 시내를 지나가다가 여기저기에 피아노독주회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눈을 의심케 하는 것은 그 포스터에는 국민악파의 거장 리스트의 수제자가 피아노리사이틀을 갖는다는 강렬한 표현이었다.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는 리스트에게 지배인은 매우 정중하게 맞이 하며 “제자분의 연주회에 초청을 받아 오셨군요. 귀한 분께서 저희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 호텔로서는 큰 영광입니다.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라는 인사와 더불어 객실로 안내되었다. 그러나 리스트에게는 그 포스터의 주인공인 연주자의 이름이 너무 생소했고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적한 소도시라 리스트가 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에 알려졌고, 그 소식에 짐짓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그 피아니스트였다. 그녀는 “이제 죽었구나!”하고 망설이다가 리스트가 묵고 있는 숙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리스트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사죄하였다. “저는 오직 피아노 연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할 저로서 저의 이름만 가지고는 관객을 모으기란 너무 힘들어 궁리 끝에 우리 헝가리 최고의 장인(匠人)의 이름을 도용하게 되었습니다. 제발 이 어리석은 죄인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처절하리 만큼 용서를 빌고 있는 그녀에게 리스트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일으킨 다음 말없이 그녀를 데리고 호텔 연회장에 있는 피아노 의자에 앉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서는 그녀에게 그 날 밤 연주할 곡을 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리스트는 중간 중간 고쳐 치게 하면서 전 곡목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었다. 그리고 난 다음 리스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당신은 나에게 사사를 받았으니 나의 제자요. 그러므로 오늘 저녁 연주회는 나 리스트의 제자로서 당당하게 피아노를 연주하세요. 기대하며 성공을 빕니다.” 콘서트홀 로얄석에 앉은 리스트는 격려하는 마음으로 연주 광경을 응시했고, 그 날 저녁 연주회는 성공적으로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다.


만일 리스트가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그녀에게 “당신은 남의 이름과 명예를 도용한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다”라고 분노하며 시민들에게 폭로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연주회는 무산되고 그녀의 삶의 터도 없어졌을 것이다. 그녀는 분명히 잘못을 범한 사람이다. 타인의 이름과 명예를 도용하여 자기 명성을 빛나게 하려했으므로 당연히 비난 받아야 하고 그 대가를 치루는 것이 도리이다. 그러나 한편, 리스트가 분노하고 법에 따라 대가를 치르게 했다면 리스트는 비정하고 속 좁은 범인(凡人)으로 인식되었으리라.


우리는 리스트의 이 일화에서 인간의 죄(빚)를 속량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인간의 모든 허물을 용납하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넉넉히 인식되는 리스트의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그 어느 때보다 그리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어느 가을 날,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에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셨다. 밤새도록 기도하신 예수님은 아침 일찍 성전에 가셔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국내외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구약 성경을 해석하면서 참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난데없이 율법 선생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부정한 행위를 하다가 현장에서 발각된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세우는 일이 벌어졌다(요8:1-11,참조) 당시 유대의 종교적 기득권자인 그들은 예수님께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4-5절).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6절).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율법의 정답(正答)과 오답(誤答)을 유도한 사악한 질문으로서 그 목적은 예수님에게 법적인 덫을 놓은 것이다. 율법을 앞세워 고발하려면 산헤드린공의회로 가는 것이 옳으며, 그 경우 현장의 공범과 증인 세 사람을 대동하는 것이 율법의 절차임에도 그들은 이를 모두 무시하고 예수님 앞에 여인만 현장범으로 끌고 왔다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었다. 하지만 교활하게도 그들은 공격적이었고, 예수님은 그대로 수용하셨다.


①만일 예수님이 “돌로 치라”고 율법대로 정답(正答)을 말씀하신다면, 당시 유대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서 유대인에게 사형권이 없는 제도라 국법을 어기는 판결이 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은 죄인들의 친구로 오셔서 구원하신다는 그 동안의 ‘가르침’이 거짓이요 위선이라는 사이비성에 말려들게 되는 꼴이 되고, ②만일 ‘돌로 치는’ 벌을 거부하고 놓아 주라고 판결한다면, 이는 율법을 범하는 오답(誤答)으로서 이단으로 확정 받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지게 되는 꼴이 되는 것이었다. 그 때 예수님은 정답도 오답도 아닌 ‘현답(賢答)’을 선포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주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죄를 범하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가 아니라 그 이상의 신적 기준으로서 “죄 없는 자” 곧 그런 자가 있으면 “먼저 돌로 치라”는 고차원의 판결 선언인 것이다. 리스트로 하여금 전 생애를 돌 던지는 비판자에서 현답으로 세상을 부요케 하는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그 여인에게 고스란히 흐르게 하신 십자가의 은혜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군중들이 부끄러워 떠나간 자리에는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는데 정적을 깨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말라” 하심이었다. 리스트가 피아니스트에게 보여 준 곱디고운 모습은 <원수에게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는 그리스도의 가없는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 그리고 한국 교회에 가장 절실한 윤리적, 정신적 화두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바로 우주를 품에 안으신 용서의 사랑을 모두의 혈관마다 흐르게 하는 ‘현답’이 아니겠는가!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동사형이다. 그 동사형의 현답만이 세상을 살맛나게 한다는 것을.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b).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