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조작인가> 10-13쪽 ‘옮긴이의 글’ 중에서, “(린네만은) 그 후에 인도네시아 바투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고, 독일에서도 살면서 네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 중 가장 먼저 저술한 책이 <역사비평은 과학인가 의견인가>(1986년)이다. 그 후 20년 후에 집필한 본 번역서 <역사비평은 과학인가 조작인가>는 그녀가 이미 그 전에 저술한 책 세 권을 개괄한 것이다. 첫 책보다는 역사비평을 좀 더 자세하게 다룬다.”
“본 번역서에서 린네만은 역사비평이 조작에 의해 시작되고 진행된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놀랍게도 성경 비평은 신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철학과 문학에서 나온 것이다. 린네만은 서양 철학이 어떻게 성경비평을 하게 되었는가를 먼저 밝히고자, 여러 철학자의 영향사(影響史)를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 인문주의, 프랜시스 베이컨, 토마스 홉스, 르네 데카르트, 바뤼흐 스피노자가 성경비평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를 자세히 살핀 후에 데이비드 흄, 칸트 그리고 레싱, 헤겔을 다루면서 그들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고 영감을 얻은 혹은 그들이 얻은 결과를 그대로 자신의 신학에 적용하는 신학자들을 다룬다. 슐라이어마허, 에두아르트 로이스, 그라프, 벨하우젠, 둠, 스트라우스‧‧‧.”
--중략-- “한국의 신학대학(교회)에는 성경비평이 얼마나 들어와 있을까? 이것을 정확하게 아는 형제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보수 개혁의 보루라고 믿었던 곳에서도 성경비평의 누룩이 번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을 동료 교수들이 묵인하고 있을까? 그들이 과연 묵인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성경비판이 무엇이지 잘 모르고 있는 것일까? 성경비평은 성경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고 새로운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것이 성경비평의 관문이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잘 모른다. 이런 해석학이 일단 정착되면, 이것을 배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성경비평적 사고(思考)에 물이 든다. 그러므로 한국 학계와 교계에 해석학을 비판, 검토하는 학회들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또한 동료들의 질시를 받으면서도 성경비평의 누룩을 지적하는 용감하고 전문 지식이 있는 교수들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축자영감에 기본을 둔 성경 해석학이 본분 이해에 실제로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처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마지막 심판의 날에 심판주(審判主)로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개역개정)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오늘날은 배교(背敎)의 시대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coming)’(살전2:1) 이전(以前)에 ‘배교(rebellion)하는 일’(살전2:3)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存在)를 부정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배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