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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최초의 서양의사 드류 유대모 박사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Ph.D.), 버클리 연구교수, 남장로교 연구소와
아르메니아 조지아 연구소, '아르메니아 조지아 성지순례 핸드북', '목포 기독교 근대 역사관의 배경',
'최초의 서양 의사 드류 유대모'




미 남장로교 파송 최초의 의사 선교사인 드류(유대모) 박사는 그의 발걸음이 닿는 모든 곳이 최초의 기록이었다. ‘최초의 서양의사 드류 유대모’(좋은땅 출판사) 책이 발간된 이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삶과 사역이 많은이들에게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드류(유대모) 선교사는 목포가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개항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보다 설득력있게 표현하자면, 드류(유대모) 선교사가 1894415일 이후로 목포를 자주 언급하며 그 지정학적 중요성을 공공연하게 알리고 다닌 것이, 다른 요소들과 기가막히게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유대모 선교사가 목포의 중요성을 간파하게 된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성장 배경과 인문학적 소양을 통하여 지형과 지물을 보는 안목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국 잉글랜드의 다도해인 채널 아일랜드의 건지 섬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를 따라서 영국 잉글랜드의 남부 해안선을 경험했던 것도 그의 안목을 넓혀 주었다. 더군다나 미국으로 이민온 후에 버지니아주 메클렌버그 카운티에서 성장하면서, 바다처럼 넓은 로녹 호수와 강, 그리고 대서양에 이르는 지형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오랫동안 다독과 경험을 통해 터득힌 인문학적인 감각이 1894년에 전라도 현장을 직접 보면서 서적으로만 알던 지식에서 직접 발로 밟고 눈으로 보면서 확신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의 합성어임도 알고 있었지만, 향후 선교 스테이션 후보지에 나주는 언급도 하지 않을 정도로 지정학적인 시각이 남달랐고 탁월하였다. 나중에 목회적, 선교적 경험이 일천한 유진벨(배유지)과 해리슨(하위렴)이 주도하여 나주에 집을 구입하는 등의 행보에 대하여 드류(유대모) 선교사가 대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자명하였다. 그만큼 드류 선교사는 지리, 역사, 문화, 관습, 정치, 경제, 국제관계 전반에 걸친 인문학적인 식견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세 번째 이유는 드류(유대모) 선교사의 폭넓은 대인관계와 국제정세를 보는 견해가 특출났기 때문이다. 드류 선교사 본인도 벌써부터 목포의 중요성을 글로도 발표하고 여러 경로를 통하여 주변에 알려왔고, 이 모든 상황이 긴밀하게 작용하면서, 비밀리에 목포로 외국인 전문가가 여러달을 머물면서 타당성 조사를 하고 있었다. 이 모든 정황도 드류(유대모) 선교사가 거의 독점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인맥은 선교사들과 외국인에게만 제한되지 않았고, 서울에서 잠시 만났던 도산 안창호 선생도 생생하게 기억하여, 나중에 190210월에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혜련 여사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유리방황하고 있을 때, 몰골이 말이 아니었던 도산 안창호 신혼부부를 알아보고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여 미국에 정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상과 같은 이유들로 드류(유대모) 의사 선교사가 목포를 보는 시각은 놀랍고 경이로울 지경이다. 드류(유대모) 의사 선교사가 전라도 선교의 물꼬를 텄기 때문에, 세간의 관심이 지대하여 두번째 인쇄된 책들도 소진되어 가기 때문에, 이제 곧 3쇄 인쇄에 들어가게 된다. 전라도사관에서 본 저서들이 기독교인들의 사명인 기억함에 더욱 충실하여 개인, 교회,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역동적인 역사들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축복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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